[2002+20=2022] ③ 02 월드컵이 낯선 이들을 위한 설명서 '우리가 왜 지금까지 열광하냐면..'

조효종 기자 2022. 6. 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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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당시 한국 국가대표팀). 게티이미지코리아

[풋볼리스트] 조효종 기자= 2002 한일 월드컵은 당시를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이 열렸는데, 우리 대표팀이 무려 세계 4위에 올랐으니까. 그러나 그때 추억을 곱씹은 만큼 세월이 훌쩍 지나갔고, 평생 안줏거리는 이제 '아재'를 판독하는 기준이 됐다.


이대로 4강 신화가 잊히게 둘 수는 없는 법. '풋볼리스트'가 '월드컵 못 봤겠네?'라는 질문이 지겨운 세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섰다. 당시 해설위원이자 기자로 2002 월드컵 현장을 경험한 '사장님' 서형욱 해설위원이 그 찬란했던 한 달을 되살리는데 도움을 줬다.


▲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2-0) – 6번째 도전 만에 이뤄낸 역사적인 월드컵 첫승


월드컵 첫 경기가 지니는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당시는 승리가 더욱 절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월드컵 개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한 적은 없었다. '토너먼트에 오르지 못한 첫 번째 개최국'이라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16강에 올라야 했고, 이를 위해 폴란드는 꼭 잡아야 할 상대였다. 게다가 한국은 앞서 다섯 차례 월드컵 본선에 참가해 1승도 거둔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열리는 기념비적인 월드컵 본선 첫 경기에서 첫 승을 따내는 것은 누구나 꿈꾸던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히딩크호는 그걸 해냈다. 공격과 미드필더의 중심이었던 베테랑 선수들이 해결사로 나섰다. 전반 26분 베테랑 공격수 황선홍이 이을용의 크로스를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해 선제 득점을 기록했다. 후반 8분에는 전방 압박으로 상대 공을 가로챈 고(故) 유상철이 중거리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대회 전부터 경계대상 1호였던 '폴란드 특급' 엠마누엘 올리사데베는 한국의 승리를 막지 못했다.


"현실적인 목표는 16강이 아니었다. 물론 홈이니까 기대하는 시선이 있었지만 꿈이 현실이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본선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1승이 우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폴란드전 황선홍의 골은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득점이었다. 황선홍의 득점이 없었더라면 그 뒤 수많은 명장면과 영광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 조별리그 2차전 미국전(1-1) – 국민들을 속 시원하게 해준 '오노 세리머니'


한국은 1차전 승리로 기세가 높았으나 2차전을 쉽게 풀어가지 못했다. 조 최강팀 포르투갈을 3-2로 격파한 미국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 전반 22분 클린트 매티스에게 선제 실점을 허용했다. 전반 38분 황선홍이 이끌어낸 페널티킥을 키커 이을용이 실축하기도 했다.


이을용은 후반전 페널티킥 실축을 만회했다. 후반 33분 직접 프리킥을 얻어낸 뒤 페널티박스로 정확한 킥을 전달했다. 안정환이 헤딩 슛으로 연결해 경기의 균형을 맞췄다. 득점 직후 안정환은 코너 깃발로 달려가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뒤따라온 이천수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깜짝 놀라는 포즈를 취했다. 이는 같은 해 2월에 열린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500m 결승에서 미국 선수 아폴로 안톤 오노의 과도한 액션으로 1등으로 결승선에 도착한 김동성이 실격 처리돼 온 국민이 분노했던 사건의 패러디였다.


▲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전(1-0) – 송종국의 그날, 박지성의 한방


1승 1무로 조 1위를 달리고 있던 한국은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오를 수 있었다. 심지어 동시에 진행된 경기에서 폴란드가 전반 5분 만에 미국에 2골 앞서 승점 1점이면 조 1위도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거스 히딩크 감독도, 선수들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오른쪽 윙백으로 선발 출장한 송종국은 이날 '인생 경기'를 펼쳤다. 2000년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당시 레알마드리드에서 뛰고 있던 세계적인 스타 루이스 피구를 꽁꽁 묶었다. 그리고 훗날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며 '해버지(해외축구의 아버지)'가 된 박지성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득점을 터뜨려 포르투갈을 침몰시켰다. 후반 25분 이영표의 크로스를 가슴으로 받아낸 뒤 발로 트래핑해 세르지우 콘세이상을 제치고 슈팅을 때렸다. 슈팅은 비토르 바이아 골키퍼 다리 사이를 통과했고, 박지성은 벤치로 달려가 히딩크 감독 품에 안기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한편, 이 경기 포르투갈 대표팀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던 파울루 벤투 당시 선수는 20년 후 한국의 감독으로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을 준비하고 있다.


"인천에서 열린 포르투갈전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길거리 분위기가 대단했다. 한 자동차가 '빵빵 빵빵빵' 경적을 울리면 다른 자동차들이 화답했다. 사람들은 뚜껑이 있건 없건 몸을 밖으로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드디어 '축구 선진국'이 된 느낌이었다. 그만큼 기세가 좋았다. 16강 진출로 선수단은 군면제 혜택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16강은 당시 그 정도의 업적이었다."


▲ 16강 이탈리아전(2-1) – 치열하고 처절했던 경기를 끝낸 안정환의 골든골


한국의 월드컵 첫 토너먼트 경기는 다사다난했다. 한국은 전반 3분 만에 앞서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프리킥 공격 상황에서 상대 풀백 크리스티안 파누치가 설기현을 잡아채 넘어뜨려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그러나 키커로 나선 안정환의 슈팅이 잔루이지 부폰 골키퍼를 통과하지 못했다. 전반 8분에는 김태영이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팔꿈치에 맞아 코뼈 부상을 입었다. 10분 뒤에는 비에리에게 선제 실점까지 허용했다.


후반전 히딩크 감독은 승부수를 던졌다. 수비수 김태영, 수비형 미드필더 김남일, 수비수 홍명보를 연이어 빼면서 공격수 이천수, 황선홍, 차두리를 투입했다.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과 박지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교체였다. 이 승부수는 후반 43분 설기현이 동점골을 터뜨리면서 결실을 맺었다.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연장 전반 12분 변수가 발생했다. 프란체스코 토티가 한국 페널티박스 안에서 송종국과 경합하다 넘어졌다. 골든골 제도가 존재하던 때라 페널티킥이 나오면 경기가 끝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 바이런 모레노 주심은 토티의 액션이 과했다고 지적하며 옐로카드를 꺼내들었고 단호한 표정으로 이미 경고 한장을 안고 있던 토티에게 경고 누적 퇴장을 선언했다. 수적 우위를 점한 한국은 연장 후반 12분 이영표의 크로스에 이은 안정환의 헤딩이 골라인을 넘어가면서 승리를 따냈다. 안정환은 이 골든골로 한국에선 영웅이 됐지만 다시 소속팀 AC페루자(당시 이탈리아 세리에A)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기자들은 월드컵이 열리기 한 달 전부터 대표팀 훈련을 따라다니며 취재했다. 16강까지 오르니까 '이제 집에 좀 가자'고 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16강이 연장에 접어들면서 '적당히 하라'는 농담 섞인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안정환의 골든골이 터지니까 모두가 서로를 끌어안고 좋아했다."


안정환(당시 한국 국가대표팀). 게티이미지코리아

▲ 8강 스페인전(0-0, 5PK3) – 이운재와 홍명보의 미소, 전무후무 4강 신화 달성


유럽 도장깨기 3차전이었다. 한국은 포르투갈(당시 FIFA랭킹 5위, 유럽 2위), 이탈리아(6위, 유럽 3위)를 격파한 데 이어 FIFA랭킹 8위, 유럽 4위 스페인을 만났다(FIFA랭킹 1위였던 프랑스는 조별리그 탈락). 스페인전은 체력, 집중력 싸움이었다. 두 팀 모두 16강에서 연장전을 소화했는데 한국이 조금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스페인은 아일랜드와 승부차기까지 치르긴 했으나 16강 이후 5일을 쉰 반면 한국은 불과 3일 휴식 후 또 연장 승부를 펼쳤다.


120분간 두 팀 모두 득점을 기록하지 못하면서 결국 승부차기가 이어졌다. 체력적으로 한계에 봉착한 상황임에도 1~3번 키커 황선홍, 박지성, 설기현(이상 한국), 페르난도 이에로, 루벤 바라하, 차비 에르난데스(이상 스페인)가 모두 득점에 성공했다. 차이는 4번 키커에서 갈렸다. 안정환은 골대 가운데를 노려 이케르 카시야스 골키퍼를 뚫어냈지만 호아킨 산체스가 잠시 멈칫하고 때린 슈팅은 이운재에게 방향을 읽혔다. 이운재는 선방 이후 카메라를 보고 미소를 보였고, 그 미소는 잠시 후 마지막 키커로 나선 주장 홍명보에게도 이어졌다. 골망을 흔든 홍명보는 오른팔을 빙빙 돌리며 쉽게 보여주지 않는 활짝 핀 표정으로 4강행의 기쁨을 양껏 표출했다.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은 세계 축구사에도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도 비유럽, 비남미 국가 중 월드컵 준결승에 오른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 4강 독일전(0-1) – 칸과 발락


준결승에 진출한 이상 더 높은 곳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으면서 사기도 높았다. 결승이 열리는 요코하마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4강을 맞이해 '붉은 악마'가 준비한 카드 섹션 문구는 '꿈★은 이루어진다'였다.


하지만 독일엔 철벽 수문장 올리버 칸이 있었다. 칸은 놀라운 선방을 선보이면서 한국의 득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전반 8분 차두리의 크로스에 이은 이천수의 논스톱 슈팅을 걷어낸 장면은 압권이었다. 한국은 결국 후반 33분 미하엘 발락에게 맞은 일격을 극복하지 못했다. 칸은 독일이 결승에서 브라질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음에도 각각 최우수 선수, 골키퍼에게 주어지는 골든볼과 야신상을 동시 수상했다.


이 패배는 한국이 독일에 진 마지막 경기이기도 하다. 한국은 2004년 친선경기에서 독일을 3-1로 꺾은 데 이어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에서 독일을 조 최하위로 떨어뜨리는 2-0 승리를 거두며 16년 전 패배의 아픔을 씻었다.


"우리가 잘해서 8강에 올랐는데 '이게 맞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4강 진출하고 나서는 '우리가 결승까지 가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정식 월드컵으로 인정되지 않을 것 같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선수들도 그런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일들이었다. 준결승에서도 요즘 말로 '졌잘싸'했기 때문에 만족감과 축제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 3, 4위전 터키전(2-3) - 꿈같았던 한 달의 끝


터키전은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으로부터 25일 뒤인 6월 29일에 치러졌다. 이미 한 달간 모든 것을 불태우고, 이뤄낸 뒤에 치르는 경기였기 때문에 에필로그 성격을 지닌 경기였다.


그러나 감상은 11초 만에 깨졌다. 킥오프 직후 유상철이 홍명보에게 패스했는데 홍명보가 공을 즉각 찾지 못했다. 터키 공격수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빼앗았고 하칸 수크르가 득점으로 연결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월드컵 역사상 최단 시간 골로 남아있다. 한국은 전반 9분 이을용이 그림 같은 프리킥 동점골을 터뜨렸지만 전반 13분, 32분 일한 만시즈에게 연속골을 허용하며 다시 리드를 내줬다. 경기 종료 직전 송종국의 중거리포로 한 골을 만회하는 데 그쳤다.


물론 더이상 승패가 중요한 순간은 아니었다. 2002 월드컵은 터키에도 의미 있는 대회였다. 1954년 이후 48년 만에 본선에 참가했는데 3위에 오른 것이다. 한국과 터키 선수들은 경기를 마친 뒤 뒤섞여 어깨동무를 하며 꿈같았던 한 달을 마무리했다.


"2002 월드컵의 모든 장면에는 서사가 있었다. 다양한 스토리들이 미완인 상태로 월드컵에 진입해 퍼즐이 하나씩 맞춰졌고 멋있게 마무리됐다. 황선홍은 당대 최고의 공격수였는데 월드컵과 유독 연이 없는 선수였다. 그런 선수가 아픔을 씻어내면서 한국의 역사적인 첫승을 결정짓는 골을 넣었다. 대표팀 발탁에 의문 부호가 붙기도 했던 박지성은 환상적인 골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다. 당시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던 안정환은 본인의 실수를 완벽하게 만회하면서 드라마를 썼다. 모두가 돌아가면서 주인공이 됐다. 대표팀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줬다. 막연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없다는 게 증명됐으니까."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 '2002+20=2022'은 풋볼리스트의 한일 월드컵 20주년 기념 기획기사입니다. 월드컵 첫 경기 20주년인 4일 특집기사 4편이 공개되며, 이후 중요한 경기 날짜에 맞춰 회고 인터뷰 4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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