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비판받은 MZ세대에 대한 새로운 평가
[이준목 기자]
격차가 보편화된 시대, 수많은 불평등과 갈등 속에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3월 17일 방송된 KBS1 특집 프로그램 <다음이 온다>에서는 1부 '한국사회 DNA-갈등을 넘어'라는 주제로 현재 한국 사회의 시급한 현안으로 부상한 갈등과 불평등, 격차 해소에 대한 통찰의 시간을 가졌다.
사회심리학자인 허태균 고려대학교 심리학부 교수가 첫 강연자로 나섰다. 허 교수는 한국 사회가 과거에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선진국의 방식을 도입하고 모방하여 효과를 거뒀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제는 선진국 반열에 접어든 한국을 오히려 세계가 부러워한다고 했다. 그런데 허 교수는 "아직도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꾸 밖을 내다보려고 한다"며 '우리만의 방식'을 찾기보다 외국 방식에 기대려는 뿌리깊은 착각과 오해를 지적했다.
불평등과 공정은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됐다. 하지만 외국의 기준으로는 풀리지 않는 한국 사회만의 문제도 있다. 허 교수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흔한 오해로 '서구 사회는 개인주의, 한국사회는 집단주의'라는 고정관념을 꼽았다. 허 교수는 일본 시절의 경험담을 토대로 기계 부품처럼 정해진 역할대로만 하는 것을 중시되는 사회, 나보다 집단이 더 중요한 사회를 집단주의 사회로 규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학계에서 한국 사회가 집단주의 특징과는 거리가 멀다는 분석들도 점점 나오고 있다.
집단주의 성향을 대표하는 특징중 하는 분노다. 자신에게 피해가 오거나 생각이 다를 때 나타나는 반응이 분노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 개념상 집단주의 사회는 분노가 높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분노가 높은 사회다. 그리고 한국인 중에서도 개인주의 성향인 사람들이 집단주의 성향보다 분노가 더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개인 중심 성향이 높을수록 분노를 표출하고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다면, 집단중심 성향이 높을수록 분노 통제도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 사회에도 이 두 성향이 공존하고, 더 이상 서구사회의 시각처럼 한국 사회를 집단주의 경향으로만 단정할수 없다는 것.
한국인 특유의 자신감과 자기애도 집단주의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성향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개인주의인가. 요즘 MZ세대로 불리우는 젊은 세대는 흔히 개인주의가 강하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허 교수는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NO'라고 이야기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이기주의가 자신만의 이익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개인주의는 국가나 사회보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 소신을 더 중시하는 것 뿐이다.
유튜버 겸 작가인 홍석남-김현영 부부는 안정된 대기업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불확실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다. 홍석남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도 가장 신경쓰였던 부분으로는 '주변의 시선'을 꼽았다. 허 교수는 "바로 이거다. 개인주의자들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지적하며 "개인주의는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에 있어서, 자기 내적인 요인(믿음, 신념)이 중요하다. 그 이외의 것을 영향을 미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아닌
허 교수는 점심시간에 여러 사람이 식당에서 메뉴 합의를 하는 장면을 예로 들며, 한국인은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고 의견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는 성향이라고 설명했다. 개인주의라면 타인이 무슨 메뉴를 고르던 상관없이 혼자 자기 먹고 싶은 것만 신경쓸 것이다.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둘 다 아니라면 대체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러한 한국 사회만의 특징을 설명하는 새로운 대안적 개념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상호 조화와 공생을 추구하는 '관계주의'다.
허 교수는 집단주의와 관계주의를 설명하며 '부품과 관계'에 비유했다. 부품의 가장 중요한 정의는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휴대 전화에서 부품 교체가 가능한 것은 부품의 역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사람과 사회에 비유하면, 한국 사회는 사람을 부품 취급하는 것이 금기시된 사회다. 휴대전화의 부품은 마치 집단주의와 같다.
부품은 부품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뿐 다른 부품의 역할에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조직 운영을 휴대전화 부품에 비유하다면 전체적으로 철저한 사전 설계를 통하여 최적의 역할(부품)을 뽑는 형식이 아니라, 구성원간의 합의를 통하여 유연하게 역할 수행을 결정하는 방식에 가깝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적응력을 보이는 특징을 가진다.
벨기에 출신 줄리안은 IMF 외환위기 사태 당시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과 집단주의의 연관성에 대하여 질문했다. 허 교수는 "집단주의는 역할을 지정하고 부여해주는 것이다. 금모으기 운동은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한국인의 관계주의 속성이기 때문에 나올수 있었던 행동"이라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한국은 유연성을 가지고 상황에 맞추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원칙과 규칙대로만 따라가는 문화는 겉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답답하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일본의 코로나19 방역 대응을 예로 들며 일본 사회는 매뉴얼이 없는 상황에 취약하다고 분석했다.
허 교수는 한국 사회가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이룬 원동력이 바로 이러한 한국인들의 '현장 적응력'이라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한국 사회가 위기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로 "위기는 자주 오기 않는다. 그래서 매뉴얼에만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관계주의의 강점도 이러한 현장 적응력에 있다는 것이 허 교수의 주장이었다.
배우 송선미는 "관계주의가 조직문화와 이해관계에서 부딪히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허 교수는 " 관계주의건 집단주의건 무엇이 더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성향이라는 것을 안다면, 정반대로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지향점까지 타협이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중요한건 우리(자신)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데 외국의 기준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우리만의 특징이 있다. 한국 사회의 DNA를 정확하게 알면 합의점을 찾는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전제 조건으로 허 교수는 '저 사람은 개인주의, 집단주의'라는 식으로 잘못된 범주화와 낙인을 찍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혐오와 분노의 '갈등 사회'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오늘날 그저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집단적 행동을 벌이는 경우와 부작용도 많다. 허 교수는 "한국인에게는 자신의 주장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DNA가 강하다"라고 분석했다. 한국인은 흔히 내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강하게 분노한다. 이런 영향을 주고받는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일수록 분노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되고 동일한 생각을 할수 있다는 착각은 관계주의의 부작용을 초래한다. 나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향한 과도한 혐오와 부정적 평가, 낙인 찍기 등의 갈등이 발생한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와 같아질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순간 갈등은 커진다.
세대간 갈등도 심화되고 있다. 기성세대는 MZ세대를 개인주의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허 교수는 연구 결과 MZ세대가 오히려 '상대방에 따라 나의 생각과 행동을 유연하게 바꾸는' 관계주의에 더 가깝다고 평가했다. 고려대 문화사회연구실에서 20년에 걸쳐 총 47개의 분석을 종합한 '한국인의 문화성향에 대한 통합분석'에 따르면 조사기간 동안 2030세대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성향간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과거의 사회구조가 소규모의 직장, 사회에서 관계주의를 충족시켰다면, 오늘날 거대화되고 복잡해진 사회는 관계주의를 벗어나 청년세대에게 집단주의속 부품이 된듯한 박탈감을 주고 있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와 사회에 분노하는 것은, 잃어버린 관계의 회복을 통하여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 있다. 이제는 개인주의-집단주의의 이분법적 구분을 벗어나 관계주의에 기반한 한국 사회만의 설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현대의 한국인은 관계주의 안에서 '역할'과 '관계', '가치' 간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강연을 마치며 허 교수는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가. 이 선택이 한국 사회가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결정요인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며 "모든 조직문화가 장단점이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우리에게 맞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지금 필요한 시점"이라는 화두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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