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가운 챙기면서 수영복 빼먹는 '허당美'

2022. 4. 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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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경의 '배우 열전'] (12)
'소탈해서 더 아름다운' 이혜숙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이혜숙은 1980년대 초 모 방송국의 사극 ‘여인열전’ 시리즈 ‘장희빈’에서의 인현왕후였다. 장희빈을 연기했던 이미숙도 대단했지만, 인현왕후 이혜숙은 단아하고 청초한 미모로 눈길을 끌었고 주인공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다.

화면으로 보는 이혜숙은 새침하고 수줍음 많은, 그야말로 벌레 한 마리 못 잡을 것 같은 연약한 이미지였고 멜로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이 딱이었다. 그러나 내가 ‘백만송이 장미’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는 이미 중견 배우로 자리를 잡은 뒤였다. 단아한 외모 덕분에 주로 주인공의 착한 엄마 역이 대부분이었지만, 연기력으로 악역도 잘 소화해냈다. ‘백만송이 장미’에서도 주인공의 엄마이자, 그 자신 또한 사연 많은 주인공을 딱 맞춤으로 연기해냈다.

‘슬픔이여 안녕’의 나이트클럽 사장이자 사채업자 역할을 맡겼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심복까지 거느린 보스 같은 사채업자 역할이라니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백만송이 장미’를 하면서 내가 봤던 그의 간결함과 대범함이면 사채업자 역할도 잘 소화해낼 거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내 짐작대로 그는 그 역할을 원래 몸에 맞는 자기 옷처럼 잘 소화해냈다. 극 중 그가 잃어버린 아들은 신화의 김동완이 맡았는데 두 사람 케미도 좋았다. 두 사람은 그해 연말 연기대상에서 신인상과 우수연기상을 받았다.

그 후로 이혜숙은 나한테 캐스팅 우선순위의 배우가 됐다. 중간에 투입돼 갈등에 불을 지펴주는 응원군 역할이 필요할 때도 이혜숙을 자주 찾았다.

‘하늘만큼 땅만큼’에서 박해진을 버렸음에도 뒷날 찾아와 재혼해 낳은 아들의 골수이식을 요구하는 생모 역할이 그랬고 ‘이웃집 웬수’에서 홍요섭과 김미숙의 사랑을 방해하는 홍요섭의 전처 역할이 그랬다. 스케줄만 되면 작은 배역이라도 흔쾌히 출연해준 그에게 항상 고마움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연기할 뿐, 배역에 대한 불만을 내색하는 법이 없다. 그런 그의 담백함과 성실함이 지금껏 활발하게 연기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겉모습만 보면 완벽해 보이는 이혜숙이 허당이라는 것은 친한 사람들만이 아는 그의 진짜 매력이다. 최근 ‘동치미’에 고정 패널로 나오는 이혜숙은 논리정연하고 합리적인 말솜씨를 보여준다. 그런 그에게서 허당미를 찾아보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정말로 그는 허당이다.

몇 년 전 프로그램이 끝나고 가까운 사람들과 1박 2일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약속 장소에서 만난 이혜숙의 짐이 한 보따리였다. “1박 2일에 무슨 짐이 이렇게 많냐”고 다들 놀라 물었더니 일행에게 먹일 내일 아침거리를 준비해왔다는 것이 아닌가. 북엇국은 유명 식당에 가서 포장하고 반찬으로 명란계란찜을 하기 위해 명란과 참기름, 뚝배기까지 준비했다는 소리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음 날 아침을 준비하는 그를 도와 식탁을 차리는데 국을 데우고 계란찜을 준비하던 그가 갑자기 나를 보더니 계란찜은 먹지 말자고 한다. 뚝배기까지 챙겼다더니 왜 저러나 했더니 뚝배기를 잘 싸놓고 집에 그대로 두고 왔다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아침부터 웃음바다가 됐다. 그날 계란찜은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중탕으로 해서 맛있게 먹기는 했다.

그뿐인가. 비치가운과 슬리퍼는 챙기면서 수영복은 빼먹는 식의 구멍은 화면 속의 단정하고 단아한 이혜숙을 보면 도저히 상상이 잘 안되는 허당미다.

허당미뿐이겠는가. 이혜숙만큼 소탈한 여배우도 드물지 싶다.

몇 년 전 나는 건강이 몹시 안 좋았다. 겨우 건강을 회복하고 머리도 식힐 겸 남프랑스 여행을 계획했다. 자유 여행을 좋아했지만 더 이상 체력적으로 자신이 없어 여행사 패키지를 신청하고 룸메이트를 구했다. 친한 사람들은 다들 시간이 안 맞아 갈 수가 없는지라 혼자 독방을 써야 할 상황이었다. 내 건강을 걱정하던 이혜숙과 연락이 됐고 농담 삼아 룸메이트 하자고 했더니 마침 시간이 된다며 함께 가기로 했다.

‘결혼작사 이혼작곡 3’의 한 장면.
▶8박 9일 여행에 옷 두 벌로 버티며 일행 즐겁게 해준 여배우

우리 팀 일행들은 연예인 이혜숙을 보고 신기해했다. 8박 9일 여행하는 동안 일행과 가이드까지 모두 이혜숙의 열혈 팬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몇몇 유명 배우와 함께 여행해본 적이 있는 가이드는 이혜숙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외국 유명 관광지에 가면 한국인을 많이 만나기 마련인데 연예인을 보면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고 싶어서 몰려든다. 대부분 여자 배우들은 도망치듯 차에 오르거나 사적인 시간을 존중해달라며 사인이나 사진을 정중하게 거부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혜숙은 싫은 기색 없이 일일이 사인해주고 사진 찍어줬다. 그런 모습을 보며 다들 진짜 성격 좋다고 감탄을 했고, 음식이든 숙소든 불평 불만 없이 잘 먹고 잘 자는 그 소탈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새삼스레 놀랐던 건 그가 8박 9일 여행에 옷은 단 두 벌만 챙겨온 사실이다. 명색이 여배우 아닌가. 그 두 벌로 8박 9일을 버텼다. 그리고 그 큰 가방에 가득 챙겨온 건 영양제와 햇반과 단무지와 김이었다. 어느 날 아침 햇반으로 그가 만들어준 단무지김밥을 먹고 일행 모두가 즐거워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 옷이 그 옷이지만 이혜숙의 미모는 한결같이 돋보였다. 이혜숙 덕분에 그 패키지 멤버들과 나에게 그 여행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이혜숙은 누구하고든 합을 잘 맞출 것 같은 사람이지만, 의의로 강단도 있다. 그녀가 얼마나 강단이 있는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종교의 개종이다. 그는 원래 크리스찬이었는데 결혼 후 시어머니 뜻에 따라 불교로 개종했다. 십수 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시고 예불을 드리러 가고 좋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불협화음 없이 며느리로 잘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종교만큼은 자신의 의지대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시어머니께 말씀드렸고 양해를 받아 다시 크리스찬이 됐다. 그동안 냉담했던 시간이 크리스찬으로서 속죄의 이유가 되기는 하겠지만, 한편으로 시어머니의 뜻에 맞춰 순종했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그의 가정이 화목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시어머니도 그간의 노력을 알기에 자신의 종교로 회귀하고자 하는 며느리의 뜻을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최근 그는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고 봉사 활동도 활발하게 하는 중이다.

최근 ‘결혼작사 이혼작곡’ 시즌3 출연 제의를 받은 그는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우선 그의 배역이 시즌1부터 출연했던 배우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교체된 것이라 작품의 일관성을 위해 그 인물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가져가야 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겠냐는 말로 응원했다. 그의 걱정과 고민은 어떤 역이든 최선을 다하기 위한 준비 과정임을 잘 알기에.

[최현경 한국방송작가협회 부이사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52호 (2022.03.30~2022.04.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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