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릇한데 아름다운 돌연변이들…도자로 구워낸 환경·소수자 문제
14개국 작가 75점 다채로운 도자예술 선봬
"지역 특색 맞게 내실 있는 축제로 키울 것"
지중해 산호초 같은 거대한 뿌리 형상에 인간의 손을 연상시키는 뭉툭한 가지가 뻗어있다. 어린이만한 체구가 녹아내린 듯한 형상으로 서 있기도 하다. 얼굴 모양의 조개, 문어 인간처럼 사람과 바다생물이 섞인 모습이 알록달록한 색감 덕에 기괴하다기보다 동화 같은 느낌을 준다.
벨기에 출신의 맨 플로린은 실물보다 큰 도자기 작품으로 낯선 경이로움을 끌어내는 작가다. 전염병과 자연 파괴, 사회적 혼란 속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인간과 자연이 돌연변이 형태로 결합된 세상으로 향한다. ‘이상한 낙원’(Strange Paradise)이란 제목의 작품은 이대로 지구가 파국으로 간다면 유전자 변형을 거친 이 같은 공존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섬뜩한 위트로 읽힌다.
이 작품은 경기도 이천·여주·광주 등에서 진행 중인 제12회 경기도자비엔날레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경기도자비엔날레는 국내에서 열리는 유일한 국제 규모의 도자 중심 행사. ‘투게더_몽테뉴의 고양이(TOGETHER_Montaigne’s Cat)’를 키워드로 내건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전에는 14개국 26명의 작가가 참가해 총 75점을 선보이는 중이다. 지난 9월 6일 개막해 오는 20일 폐막을 앞두고 있다.
지난 12일 주제전이 열리는 이천 경기도자미술관을 찾았을 때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용감한 소녀 ‘삐삐 롱스타킹’을 합친 듯한 작품 ‘네가 어떻게 감히’(네덜란드 작가 마리떼 반 데어 벤)가 입구에서 시위하듯 관객을 맞았다. 공기, 물, 불, 흙이 결합돼 문명 발달 초기단계부터 인간과 함께 해온 도자 공예가 친환경 이슈와 맞닿아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코로나19 등을 거치며 다소 축소됐던 비엔날레가 7년 만에 대대적으로 본행사를 개최하면서 가장 눈에 띄게 배치한 키워드가 ‘환경’인 것도 일맥상통한다.
3개 층에 걸친 전시작 가운데 말레이시아 출신의 제임스 시트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도자기, 즉 속이 빈 그릇 용기라는 특성을 활용해 ‘이슈들’ 시리즈를 만들었다. 겉으로는 길쭉한 용기처럼 보이지만 거울을 통해 본 내부에는 각각 상어지느러미, 길고양이, 플라스틱 용기 등이 표현돼 있다. 샥스핀을 얻으려 상어에게 고통을 주는 것, 반려묘를 키우면서 길고양이는 외면하는 문제 등을 꼬집는 것. 말레이시아 속담 ‘모든 바위 아래에는 새우가 있다’에서 영감을 받아 겉으로만 보면 지나치기 쉬운 문제들을 환기시킨다.
소수자·여성·난민 문제도 다채롭게 표현되고 있다. 2층 전시장에서 만나는 거대한 흑인 여체와 창백한 두 아이 상반신은 미국 출신 팁 톨랜드의 ‘백색증을 앓고 있는 아프리카 아이’. 탄자니아의 알비노(백색증) 아이들이 그릇된 미신 탓에 신체를 훼손당하고 고통받는 현실을 고발한다. 실핏줄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엄마의 누드상이 한덩어리로 구워진 도자 작품이란 게 놀랍고,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예쁜 도자 인형’에서 크게 벗어난 리얼리즘이 시각적 충격을 준다.
이 밖에도 한국 작가 맹욱재가 날아다니는 동물들의 유토피아를 표현한 ‘몽중림’, 살상무기인 탱크를 정교한 청화백자 기법으로 풍자해 빚어낸 태국 작가 와신부리 수파니치보라파치의 ‘드래곤부대 2020’ 등이 눈길을 끈다. 비디오작업이 대세가 된 현대미술 트렌드에 맞춰 도자기를 매개로 한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은 작품도 여럿이다. 전반적으로 ‘도자로 이런 것까지 보여줄 수 있다’는 외침이 담긴 큐레이션이다.
이번 주제전의 제목은 미국인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시리즈 중 두 번째 책인 『투게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Together: The Ritual, Pleasure, And Politics of Cooperation)』에서 영감을 받은 것.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찌 알겠는가?”라는 유명한 물음을 차용해서 현대사회의 협력과 소외 문제를 풀어간다는 의도다. 이 밖에 70여개국 1500여명의 작가가 참가한 제12회 국제공모전을 통해 20여개국 작가 57명의 작품을 추려 여주 경기생활도자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다.
임미선 예술감독은 “현대 도자는 야외 조각품을 비롯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매체인데, 아직도 도자 하면 실용적인 그릇만 떠올리는 게 아쉽다”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도자를 통해 멀어진 인간관계를 한층 가깝게 만드는 작업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경기도자비엔날레는 2001년 경기 도자엑스포 개최를 계기로 시작됐다. 당시 지자체장이 경기지역의 경제 활성화 등을 목표로 의욕적으로 추진했고 국제공모전 등을 통해 세계 도자공예의 흐름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수백만명이 찾는 축제가 됐다. 하지만 초창기 컨벤션 효과가 걷히고 예산 지원도 축소되면서 고만고만한 지역 행사로 쪼그라든 측면이 없지 않다. 2011년부터 자체 브랜드 강화를 위해 이천·여주·광주의 도자기 축제와 분리 개최에 나선 것도 오히려 관람객 감소의 요인이 됐다.
비엔날레를 주최하는 한국도자재단의 최문환 대표는 “경기도, 특히 이천·여주·광주는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인해 우리 도자 공예·산업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지역 수요에 맞게 비엔날레의 내실을 기하면서 도자 문화 확산에 앞장서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재단의 김동진 경영본부장은 “이천·여주·광주 측과 시너지 효과를 위해 다시 도자기 축제와 비엔날레를 합동으로 개최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그간 쌓인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보다 국제적인 도자비엔날레로 키워갈 것”이라고 말했다.
여주=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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