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에 놀란 안성재…계급장 뗀 요리 버전 '오겜'의 숨은 의도

2024. 9. 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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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푸드칼럼니스트의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리뷰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서 한 출연자가 요리 경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인기리 방영 중인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을 보면서 외국 주방에서 일하던 십수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주방에서는 선후배가 없다. 실력이 있으면 올라가고 없으면 밀려났다. 실력은 하루만 같이 일해보면 알 수 있다. 재료와 음식에 대한 지식, 재료 다루는 방법,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태도, 뒷정리와 청소하는 모습만 봐도 실력이 가늠된다.

'흑백요리사'는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과는 분명 다르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처럼 셀럽 셰프들이 장기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한식 명인들에 대한 존경을 우선시했던 올리브 ‘한식대첩’과도 결이 다르다. 거대한 세트장에서 계급장을 떼고 음식 하나로 승부를 거는 셰프들의 모습은 ‘오징어 게임’의 요리 버전을 보는 듯하다.

국내외 시청자들은 요리의 세계에 몰입하며, 프로 요리사의 진지한 모습에 열광하고 있다. 17일 공개된 뒤 넷플릭스 비영어 부문 TV시리즈 글로벌 1위를 차지했고, 화제성 또한 압도적이다. 12부작인 프로그램은 24일 7회까지 공개하면서 반환점을 돌았다.

‘흑백요리사’에 나오는 요리들은 가정 주방에서는 불가능한 종류가 대다수다. 만화책에서나 보던 요리들과 파인 다이닝 주방에서 할 수 있는 음식들이 많다. 주방의 대가들은 물결 무늬의 다마스커스(Damascus) 칼을 쓰며, 커다란 오리를 400도가 넘는 숯불 위에서 직접 손으로 굽고, 1000만원에 달하는 스위스제 티타늄 고속 믹서기로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질소를 이용한 극저온 조리와 고급 오븐을 이용한 저온 항온 조리 등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는 기기들로 무장한 셰프들은 몸을 단련한 장인이자, 각종 기구와 데이터를 다루는 엔지니어처럼 보인다.

'요식업계의 왕' 백종원은 '흑백요리사'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한다. 사진 넷플릭스

이처럼 프로 요리사에 대한 '진지한' 프로그램이 나오고,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만큼 요리하는 사람들이 줄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야구를 하진 않지만 JTBC ‘최강야구’를 즐겨보고 응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리의 영역’이 달라졌다


우리는 집밥을 먹으며 조리자의 의도를 묻지 않는다. 집밥에서 중요한 건 맛과 가성비다. 그런데 심사위원인 안성재 셰프(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모수'의 셰프)는 참가자들에게 ‘조리의 의도’를 묻는다. 조리의 의도를 묻는 것은 ‘맛있냐 맛없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미술과 궤를 같이 하는 파인 다이닝의 문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을 매회 강조한다. 대체로 일반 가정 요리는 식당에 비해 싱거워서, 식당 음식이 집밥보다 더 맛있게 느껴진다. 또 대중에게 음식 간은 ‘건강’과 ‘취향’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영역이다. 그러나 프로의 주방에서 ‘간’은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된다.

국내 유일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모수'를 운영 중인 안성재 셰프는 까다로운 심사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 넷플릭스

간을 잘 보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주방에서 나가는 모든 음식에 같은 수준의 간, 즉 염도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집요하고 강박적이어야 한다. 프로 요리사는 적정 염도가 100일 때 80~99 수준의 염도를 오로지 혀 하나로 측정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적들은 일반 가정 요리와 구분되는 프로의 요리에 대한 강조다. 식당과 집밥의 차이가 덜했던 과거를 지나, 음식점과 가정 요리가 아예 다른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요리엔 존중이 들어있다


미식이란 취미는 다 큰 어른의 반찬 투정일 수도, 동시에 죽고 사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음식과 식재료에 대한 존중, 혹은 경건한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미식은 그 어떤 취미보다도 더 속물적으로 느껴진다.

‘흑백요리사’는 요리사끼리의 존중도 중요하게 보여주지만 ‘재료’에 대한 존중도 강조한다. 맛있는 요리라는 것은 그저 감각의 영역이 아니라, 농부와 어부 같은 생산자부터 재료를 주방까지 옮겨 놓은 유통업자까지 수많은 사람의 시간과 노동에 대한 존중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서 한 출연자가 요리 경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서 한 출연자가 요리 경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제작진은 모든 소와 돼지의 부위를 세트장에 옮겨놓고 정육점처럼 꾸몄다. 사진 넷플릭스

이에 요리는 어떤 한 개인이 가진 ‘자아의 표현’을 넘어서서 그 땅과 시대, 그리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총체적인 예술이 될 수 있다.


식사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침체된 요식업에 활력을 주기 위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기획 의도가 통한 걸까.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모든 요리사들의 식당 예약이 다 찼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한편으로는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식당을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방송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셰프의 식당을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그 경험을 위해선 갖춰야 할 태도가 있다. 손님들이 와인 한 잔 없이 음식 하나로만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건 식당 입장에선 손해다.
주어진 시간 안에 100인분을 준비해야 하는 미션을 받은 '백수저' 참가자 최강록. 사진 넷플릭스

안성재 셰프가 이끌던 레스토랑 ‘모수’가 잠정적으로 휴업한 이유도 마땅한 스폰서를 찾지 못해서였다. 파인 다이닝은 구조적으로 이익을 내기 어렵다. 방송에서 보듯 수많은 요리사가 달려들어야 한 접시가 완성된다. 거기에 소요되는 인건비와 재료비, 수도·광열비는 손님들로부터 아무리 비싼 값을 받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숫자를 찍고 만다.
'흑백요리사' 김학민PD는 "양 극단의 심사위원 2명이 치열하게 토론하며 심사하는 것이 우리 프로그램의 재미"라고 말했다. 사진 넷플릭스

방송에서 백종원·안성재 심사위원은 여러 종류의 음식을 심사하는 동시에 그 음식들을 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요리사의 의도에 맞춰 비빔밥을 먹는 백종원, 급식대가의 상차림에 눈이 반짝였던 안성재의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심사하면서도 상대를 동업자적인 관점에서 존중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간이 정확한지 알아채고 요리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식당일수록 오래 찾을 수 있도록 동업자적인 관점에서 식당을 찾을 필요가 있다. ‘집밥’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식사의 기술’일 지도 모른다.

■ 정동현 푸드칼럼니스트

사진 중앙일보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유통회사를 다녔다. 서른을 앞둔 어느 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 영국 요리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호주 멜버른에서 수년간 요리사로 일하다가 한국에 돌아와서는 직장인으로의 삶을 다시 시작했다. 현재 롯데백화점 Food전략TF 팀장으로 근무 중이다.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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