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디자인계의 걸 크러쉬 아이콘,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3
아무리 우먼 파워가 강해졌다고 하지만 유리 천장은 여전히 높고 두껍다. 건축&디자인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Partricia Urquiola)'라는 그 자체로 21세기 디자인이 된 이름이다. 그녀의 동선만 따라가도 디자인에 진심인 회사들의 지도가 그려진다.
디자인 분야의 역사책을 펼쳐보면 어느 순간 망연자실해진다. 패션, 공예,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제외하고는 소수의 여성만이 디자인 디렉토리를 장식할 뿐이니 말이다. 21세기에 진입한 지 사반세기가 가까워진 지금도 그렇다. 다만 앞으로 쓰일 히스토리는 다를 것이다.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같은 파워풀한 디자이너가 커다란 이정표 역할을 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정작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장단점, 여성적인 디자인의 기준을 부정하곤 하지만, 21세기 현존하는 디자인 여제임을 부정할 수 없다.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그리고 세계로 향한 디자이너
1961년 스페인 출생이지만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를 키운 건 팔 할이 이탈리아였다. 그녀는 마드리드 건축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밀라노 폴리테크닉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고, 아킬레 카스틸리오니(Achille Castiglioni)와 비코 마지스트레티(Vico Magistretti)라는 거장 아래에서 수학하며 이탈리아 가구 업계의 작업 방식을 몸으로 익혔다. 1998년 인연을 맺은 모로소(Moroso)의 소파 ‘안티보디’와 ‘볼란트’ 등으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2001년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스튜디오’로 독립을 선언하면서 수많은 브랜드와 함께 일했다. 까시나, B&B이탈리아, 알레시, 카르텔, 플로스, 데파도바, 몰테니, 글라스 이탈리아…그녀가 협업한 회사 리스트만 꼽아도 세계 가구 디자인 업계의 지도가 그려진다.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2005년 쾰른가구박람회에서 ‘아이디얼 하우스’ 전시관을 맡으면서다. 새로운 조형 언어와 개방성 있는 구성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전시관으로 그녀는 공동 진행한 헬라 융게리우스와 함께 떠오르는 21세기의 우먼 파워로 주목받았다. 이어 2006년에는 <월페이퍼> 매거진이 선정한 ‘올해의 디자이너’가 되었고, 2007년에는 <타임>지가 지목한 ‘디자인 대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9년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도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되었다. 모국인 스페인 왕실로부터 예술 분야의 금메달과 훈장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디자이너 이상의 디자인 전략가
가구 디자인이 다가 아니다. 그녀는 에르메스, 발렌티노, 미쏘니 등 명품 패션 브랜드의 쇼룸을 비롯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밀라노 포시즌스 호텔, 베를린 다스 스튜 호텔, 하셀루덴 호텔 등 다양한 호텔 프로젝트에도 참여하면서 건축과 공간 디자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2007년부터는 LG, 혼다, 파나소닉 등 세계적인 대기업의 디자인 컨설팅까지 맡으며,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디자인 전략가로서의 커리어도 쌓아왔다. 2022년에는 위크엔드 막스마라의 시그니처 캡슐 컬렉션 ‘하비토’를 선보였는데, 건축적 볼륨감과 수공예적 소재, 스페인 복식의 전통이 깃든 패션 컬렉션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와 손잡은 한국 기업들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와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9층 생활관과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 8층 ‘더 라운지’ 인테리어 디자인을 총지휘했으며, 시계 브랜드 파네라이의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갤러리아 명품관 매장을 디자인했다. 또 2020년 까사미아와 협업해 선보인 ‘디자이너스 컬렉션 by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라인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로에베 파운데이션 프리즈 2022 행사의 심사를 위해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 같은 심사위원인 건축가&디자이너인 후카사와 나오토 등과 북촌의 아름다운 한옥을 둘러보고 서울공예박물관을 찾았다. 한편 크리에이티브랩에서 운영하는 까시나 매장의 행사에도 참석했는데, 거의 록스타나 아이돌에 버금가는 뜨거운 호응을 얻어 스타 디자이너의 명성을 확인시켜줬다.
한계와 장르를 뛰어넘는 미감이 비결
파트리시아 우르키올라의 디자인에는 한계가 없다. 커리어를 시작한 초기, 꽃을 모티프로 삼은 모로소의 ‘안티보디’ 소파나 1930년대 빈티지 팔찌에서 영감을 얻은 포스카리니의 ‘카보슈’ 조명 등을 보면 ‘페미닌한’ 감각이 느껴진다. 하지만 디자이너 본인은 ‘여성’이라는 틀 안에 자신의 작업을 넣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2009년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에서 디자이너에게 성별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내 경우 ‘여성’ 디자이너라서 손해를 봤다거나 특별히 유리했던 적은 없다. 이건 디자인 싸움이지 성별 싸움이 아니다. 나는 내 작품을 여성스럽다고 느끼지 않는다. 더구나 여성스러운 디자인이 여성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녀가 작업한 다채로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보면,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심미적 관점과 실용적 태도가 균형을 이룬다. 자신이 사용하고 가지고 있는 것, 자신의 공간에서 보고 느끼는 것을 작품에 많이 투영한다는 그녀.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협업 브랜드나 기업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좋은 친구’의 시선으로 작업에 임한다고 한다. 그런 친밀함과 적극성이 빚어낸 무한 확장의 디자인이 세계 유수의 기업이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스튜디오를 찾는 이유 아닐까. 지금은 인류의 지속 가능성과 진화, 생태학에 대한 고민이 깊다는 디자인 여제의 다음 행보 역시 궁금해진다.
EDITOR 정성진(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