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수리공에 생긴 짐작 못할 일들, 오마이뉴스 덕입니다

김덕래 2024. 10. 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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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이육사문학관에서 시작, 대구 거쳐 진주문고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준비하며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덕래 기자]

"저는 경북 안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에서 근무합니다. 만년필을 즐겨 쓰며,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선생님 칼럼이 올라올 때마다 챙겨 읽은 애독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을 이육사문학관의 시민을 위한 강좌, '이육사아카데미' 강연자로 모시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전화로 나누면 좋겠습니다."

몇 개월 전 이런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만년필 수리를 업으로 하고, 고장난 펜 손보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기록하는 '글 쓰는 만년필 수리공'입니다. 강연은 망가진 필기구를 고치거나, 그 사연을 옮겨 적는 것과는 사뭇 성질이 다릅니다.

친숙해지는 면이 있다곤 해도, 만년필은 어디까지나 도구입니다. 펜에 담긴 속내가 아무리 절절할지언정 사물과 소통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반면 강연은 다수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보며 직접적으로 교감하는 자리입니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 앞에서 내가 준비해온 말을 조리 있게 해야 합니다. 긴장감 면에서 펜 고치고 글 쓰는 일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연이 비전문 분야인 만년필 수리공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굴곡진 길은 피해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만, 그게 최선이 아니란 걸 압니다. 아직도 제게 수리를 의뢰하며, 강아지가 야무지게도 씹었던 옛날 그 만년필 이야기를 꺼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엔 분명 시련이었지만 직진으로 뚫고 나아갔더니, 그날 이후 어지간한 펜들은 다 살려낼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곤란한 시간을 견뎌낸 후의 달콤한 보상입니다.

개가 씹은 펜촉 살려내는 힘? '못할 이유 있나' 자신감이 팔 할
▲ 펠리칸 M800 톨토이즈쉘 브라운 M촉 좌 - 강아지가 씹어 망가진 펜촉, 우 - 수리해 되살아난 만년필
ⓒ 김덕래
"사람은 자신감이 팔 할이다"라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하나.. 여기면 해결하지 못할 확률이 태반입니다. 하지만 못 살려낼 이유가 어디 있나.. 마음먹는 순간, 그만큼 가능성이 올라갑니다.

적당히 자란 대나무는 잠시 멈춘 상태로 숨을 고르며 매듭을 짓습니다. 그래야 좀 더 높이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연은 참석한 분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입니다. 청중이 눈빛과 표정에 담아 건네는 기운이, 나를 한발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작은 재주 크게 봐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어렸을 때, 육사 이원록님의 '청포도'를 참 좋아했어요. 제가 살던 집 담벼락에 포도 넝쿨이 있었거든요. 교과서에 실린 그저 아름답기만 한 시어와 문장들 속에 강렬한 의지가 담겨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AI가 인간의 지능을 위협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럴수록 아날로그를 찾는 분들이 더 많아지는 것만 같아요. 제가 이만큼의 관심이라도 받는 게 그 방증이 아닐까 싶고요."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선생님만 괜찮다면 올 하반기에 뵙는 걸로 하지요. 10월 8일 어떠세요? 어떤 내용이든 좋아요. 원하는 주제로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다 만년필에 관련된 내용일 테니까요. 안동 시민들에게 새롭고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을 믿어요."

"네. 좋아요. 저도 나름의 보답을 하고 싶어요. 혹 그날 강연 참석하는 분들 중 소장펜 점검을 원하는 분이 있겠다, 싶으면 알려주세요. 제가 당일 아침 일찍 출발할게요. 그러면 적어도 강연 몇 시간 전엔 도착할 테니 두어 시간 정도는 내드릴 수 있어요. 또 만년필 뿐 아니라 여러 필기구도 준비해 갈게요. 직접 써보는 시간도 갖게 해드리고 싶어요. 이육사문학관 아끼는 분들에게 작은 이벤트가 되면 좋겠어요."

이런 대화를 나눈 게 얼마 전 같은데, 몇 개월이 휙 하니 지났습니다. 참 질겼던 여름도 물러가고, 어느새 시월입니다.

만년필과 함께 떠나는 3박 4일간의 가을 여행
 이육사문학관 10월 8일 강연 주제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만년필'
ⓒ 이육사문학관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펜수리 강좌를 신청해 바쁜 나날 보내고 있습니다. 다들 토요일을 원할 거라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골고루 예약이 차고 있습니다.

이론적인 설명을 곁들이긴 하지만, 실습 위주로 진행하는 강좌입니다. 귀로만 배운 지식은 짧게 갑니다. 들을 땐 다 아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까무룩 잊힙니다. 하지만 펜촉을 내 손으로 직접 매만지며 익히면, 훨씬 기억이 오래갑니다.

두 달 전, 대전에서 올라왔던 한 분이 이런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만년필이 좋아 한 자루 한 자루 들이다 보니 어느새 60구 보관함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늘어버렸어요. 평생 써도 충분할 정도로 개수는 많은데, 펜촉 매만지는 요령은 전혀 몰라 답답할 때가 있더라고요. 저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을 거예요.

누구한테 전수받았든, 스스로 깨쳤든 자기가 아는 지식을 후대로 넘기는 건 중요해요. 어떤 분야의 일이든 계속 이어져야 점점 더 단단하게 여물어지거든요. 인간 문명이 다 그런 과정을 거쳐왔으니, 수리 강좌를 연 건 잘한 선택이에요. 혼자만 알고 있다 가버리는 건 무책임해요. 그럼 누군가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요."
 '펜닥터D의 수리공작소'에서 수강생들과 함께하는 펜수리 강좌
ⓒ 김덕래
9일 대구 일정은 갑작스럽게 잡혔습니다.

"저는 울산에 삽니다. 저만큼이나 만년필 좋아하는 지인이 대구에 있는데, 선생님 강좌를 듣고 싶어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늘 일에 쫓기거든요. 혹시 시간이 맞으면 내려와 강좌를 해주실 수도 있나요? 오실 수 있다면 적당한 스터디 카페를 미리 잡아놓을게요. 여의치 않으면 제가 김포로 올라갈 테니 편히 말씀해 주세요."

'여태 작업실 아닌 곳에서 진행한 적은 없지만, 불가능할 이유도 없다. 마침 안동에 내려갈 일이 있는데 안동에서 대구까지는 1시간 남짓이다.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9일 시간 낼 수 있다면 기꺼이 가겠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예정에도 없던 원정 강좌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년필을 알게 되었던 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작업실을 낸 반 년 전까지만 되돌아가도 짐작 못할 일들의 연속입니다. 이 거짓말 같은 일들의 맨 앞에 <오마이뉴스>가 있습니다(관련 기사: 만년필 수리, 드디어 함께 할 작업실이 생겼습니다 https://omn.kr/28zuc ).

오마이뉴스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아니 한 명에게라도 가닿을 수 있을까 싶던 즈음 오마이뉴스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무던한 이야기도 기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반가웠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내어 첫 글을 써 보낸 게 벌써 5년 전 일입니다.

잡지 '온 더 데스크'는 '책상 위의 모든 것을 다룬다'는 모토 아래, 도미넌트 인더스트리에서 펴내는 문구 전문 계간지입니다. 만년필을 업으로 다루는 수리공의 이야기를 책에 싣고 싶다는 연락이 왔을 때, 저는 바로 오마이뉴스가 떠올랐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제게 글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 건 분명 배려입니다. 그 호의를 저는 감사히 받았고,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온 더 데스크를 통해 이어온 지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선순환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계속 구르고 있습니다.
 도미넌트 인더스트리(Dominant Industry)에서 펴내는 문구 전문 잡지 온 더 데스크(On the Desk) 6호
ⓒ 김덕래
10일 진주 일정은 더 드라마틱합니다.

진주에서 소소책방을 운영하는 조경국 작가 덕분에, 작년 진주문고에서 출간기념 사인회를 겸한 만년필 강연을 했습니다. '진주시민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진주문고의 수장은 여태훈 대표입니다. 가끔씩 먼저 안부 물어봐 주는 게 고마워, 근처 내려간 김에 인사라도 하고 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분 역시 만년필 즐겨 쓰는 애호가기도 하고요.

"10일 내려올 수 있다니 반가운 소식인데요? 그런데 이왕 내려올 거면 작은 자리라도 만드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작년 만년필 강연 참석했던 분들 만족도도 높았고,
또 그날 일이 있어 아쉬웠다는 분들도 꽤 계셨거든요. 진주엔 저 말고도 만년필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답니다."

마음껏 수다 떨 수 있는 자리가 1년 반 만에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9일 펜수리 강좌는 이미 예약이 완료되어 곤란합니다만, 8일과 10일 강연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해 신청하면 함께할 수 있습니다.

양자컴퓨터와 AI가 세상을 변혁시킬 거라는 이 시대에 만년필 쓰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짚고, 내게 맞는 만년필 고르는 요령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만년필을 고장 없이 오래 쓸 수 있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시도해 볼 수 있는 자가조치 방법을 알림하고, 딥펜이나 글라스펜 같은 기타 아날로그 필기구에 대해서도 다룰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 덕분에 생전 처음 하는 일들에도 시도해보게 됩니다. 이번엔 가능한 질의응답 시간을 충분히 가져, 만년필에 대한 궁금증 풀어보는 시간으로 꾸미려 합니다. 무엇보다 21세기 만년필 수리공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럼 안동, 그리고 진주에서 뵙겠습니다.
 진주문고 10월 10일 원데이 클래스 '펜닥터와 함께하는 아날로그 만년필'
ⓒ 진주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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