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주 할머니의 한...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 왜 못하나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2018년 11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뒤 기자회견을 하며 강제노동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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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한 김성주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수난을 많이 겪었다. 1942년에는 아버지가 경남 진해 비행장으로 강제징용됐다. 그로 인해 아버지 소식이 끊어진 상태에서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5세 때인 1944년에는 소녀 김성주도 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에 내몰렸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라며 "네가 원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일본인 교사 오가끼의 말을 믿었다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됐다. 노예 노동과 다름없는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비행기 동체를 절단하다가 손가락 부상을 입었고, 그해 12월 도난카이 대지진 때는 왼쪽 무릎뼈를 다쳤다.
그러는 동안, 오가끼 교사는 동생 김정주에게 "일본에 가면 언니도 만나게 해주고 중학교도 보내주겠다"고 감언이설했고, 동생은 그 말을 믿었다가 일본 서해안 중간쯤인 도야마현의 후지코시강재공업으로 강제징용돼 비행기 부품을 제작하는 강제노역으로 내몰렸다.
▲ 2018년 11월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및 가족들이 미쓰비시 중공업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승소한 뒤 기자회견을 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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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본이 금전을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9년에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당시의 연금 탈퇴수당금이라며 당시 금액인 99엔을 물가상승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지급했다. 이런 일은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2015년에도 있었고 2022년에도 있었다. 2022년 7월 6일에는 장신영 할머니에게 99엔이 지급됐다. 이때 환율로 계산하면 931원이었다.
그런 일본을 상대로 두 자매는 법정투쟁을 이어갔다. 2012년과 2013년에 각각 한국 법원에 호소했고, 그 결과 김성주는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에서 역사적인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동생 김정주는 금년 1월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그런데 미쓰비시는 손해배상판결에 응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일본 국가권력이 한국 전체를 상대로 보복에 나서는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2019년 7월에 일본이 가한 경제보복과 수출규제는 김성주 할머니 등이 거둔 승리에 대한 일본 국가권력의 복수였다.
김성주 할머니는 강제징용으로 인해 신체적 상처와 정신적 상처를 함께 입었다. 그런데 정신적 상처는 일본정부와 전범기업 때문에만 생긴 게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도 책임이 있다. 대한민국은 그가 살아생전에 가해자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을 기회를 차단했다.
김성주 할머니는 배상을 거부하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전범기업의 책임을 우리가 대신 떠안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침 발표 이후에도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갔는데, 어디에다가 사죄를 받고, 어디에다가 (사죄)요구를 하겠느냐"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결국 지난해 5월 그 대위변제를 받아들이고 특허권 압류를 취하했다.
그를 포함한 피해자들이 80년 가까이 일본과 싸우는 것은 꼭 금전 때문만은 아니다. 한마디라도 사과를 받고 싶다는 심정이 그들을 움직여왔다. 그런 사과를 받아 조금이나마 한을 풀 수 있는 기회가 한일 두 정부의 공조로 인해 차단돼 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95세라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한국 사회는 김성주 할머니의 살아생전에 그 한을 풀어주지 못했다. 그 한을 온전히 풀어주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됐지만, 그것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 100세 가까이 된 다른 피해자들이 우리 곁을 다 떠난다 해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의 부재 시대'에도 그것이 여전히 가능한 것은 유족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의 움직임이 시사하는 바도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없으면 문제 해결의 동력이 크게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모든 경우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부재가 문제 해결을 결정적으로 저해하지 않는 분야도 존재하다.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같은 강제동원이 이에 해당한다.
일본은 위안부 소녀상뿐 아니라 강제징용 노동자상에도 극히 민감하다. 김성주 할머니가 대법원에서 승소하기 근 7개월 전인 2018년 5월 1일 부산 일본영사관 인근에 설치된 일제강제징용노동자상이 그달 말 강제 철거된 것은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강력한 압력 때문이었다. 막말과 망언을 일삼는 스키타 미오 중의원 의원의 행보에서도 나타나듯이, 일본 극우세력은 징용 노동자와 관련된 비석이나 동상의 철거를 지금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 7일 오후 광주 북구 효령동 영락공원 화장장에서 김성주 할머니의 유족들이 발인을 하고 있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는 향년 95세의 나이로 전날 별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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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본이 강제징용 반성 및 배상 요구에 맞서는 것이 꼭 피해자나 유족 때문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피해자들을 응원하고 일본을 규탄하는 대중의 에너지가 일본 입장에서는 훨씬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위안부 운동을 예로 들면, 1990년대부터 이 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피해자들의 역량이 그 시점에 강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이 시기에 피해자들은 노쇠해져 있었고, 이들의 열악한 정치·경제적 지위가 이때 특별히 개선돼 있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피해자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버틴 것이 위안부 운동의 세계적 확산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한국 대중이 이 문제에 공감할 준비가 됐던 것이 보다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할 수 있다.
1990년 전후의 탈냉전으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 세력이 약해지고 대중들의 영향력이 강해져 대중이 피해자들의 호소에 조금이나마 응답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 등이 용감하게 나섰다. 이것이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됐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로 곤란을 겪는 것은 피해자들의 집요한 노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90년대 이후로 전 세계 대중이 피해자들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제징용 문제의 경우에도 일본이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대중의 공감대가 지속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공감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그 에너지가 축적되는 동안에는 피해자의 부재 여하가 문제 해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공감대보다 훨씬 두텁고 넓지만, 사안의 구조를 놓고 보면 징용 문제 역시 세계적 공감대를 확보할 가능성이 얼마든 존재한다. 강제징용 문제는 인권문제인 동시에 노동문제이므로, 세계 노동운동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김성주 할머니의 한을 살아생전에 풀어드리지 못했다. 일본이 그의 앞에서 반성하고 사과하는 장을 만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일본의 반성을 도출해 사후에라도 그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기회는 한국인들에게 달려 있다. 김성주를 비롯한 징용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한을 풀기 위한 우리 사회의 노력이 계속된다면, 피해자의 부재 여하와 관계없이 이 문제의 해결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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