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5과목, 강원 7과목… 현실로 나타난 고교학점제 ‘선택권 양극화’
AI 배우는 서울 고2, 물리 하나에 멈춘 지방 고교
지역 소멸 막을 ‘학교 규모 적정화’ 불가피

서울의 A고교 2학년은 올해 1학기에 선택과목으로 15학점을 취득하게 된다. 이 학교 2학년들이 선택 가능한 수업은 모두 15개다.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인공지능 수학, 미디어 영어 등 다양한 수업 중에 자신의 진로와 진학 계획에 맞춰 5개를 수강할 수 있다. 2학기에 개설 예정인 선택과목은 16개로 더 많다.
강원도 B고교 2학년은 1학기에 선택과목으로 12학점을 받을 예정이다. 1학기에 선택 가능한 수업은 7개다. 과학 과목은 물리학 1개뿐이다. 생명과학과 지구과학은 2학기, 화학은 3학년 1학기에 편성돼 있다. 2학년 2학기 선택과목은 5개로 더 줄어든다. 5개 중 4개를 골라 12학점을 취득해야 하므로 사실상 선택권이 박탈된 ‘무늬만 선택수업’인 셈이다(표 참조).

같은 고2인데 너무 다른 선택지
28일 교육계에 따르면 올해 고2들은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선택과목들을 이수하고 있다. 고교생들이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맞춰 수업을 선택하는 고교학점제는 지난해 고1을 대상으로 도입됐다. 다만 고1 수업은 공통과목 위주로 진행된다.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수업을 골라 듣고 학점을 따는 시기는 2학년부터다. 지난해 1학년이 2학년이 된 올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고교학점제는 장점이 많은 제도다. 무엇보다 ‘잠자는 교실’을 깨울 해법으로 주목 받았다. 학생이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고 흥미있는 수업이라면 몰입도가 다를 것이란 구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역·학교별 격차였다. 학교 규모에 따라 수업 선택권이 달라지는 것이다. 특히 고교 수업은 대입 수시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위주 전형에 직결된다.
A고교는 학생 수 1000명 수준의 대형 학교다. 교사도 90명에 육박해 다양한 수업을 개설할 수 있다. 서울에 있어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가르칠 교사가 없으면 유능한 외부 강사를 구하기도 용이하다. 반면 B고교는 학생 50명 규모의 작은 학교다. 교사도 10여명 안팎이어서 다양한 수업을 열 수 없다. 기본적인 과목을 가르칠 교사조차 부족해 여러 학교를 순회하는 순회교사에게 수업을 맡기고 있다. 인구소멸 지역이어서 ‘웃돈’을 주더라도 강사를 구하기 어렵다. 학교와 교사들이 쥐어짠 결과가 2학년 선택과목 12개였다.
학교 크기에 좌우되는 ‘배움의 밀도’
단지 선택수업의 수가 문제가 아니다. 학생부 위주 전형은 3학년 1학기까지의 성취를 평가한다. 학생들의 수업 선택이 대입에 영향을 주는 시기는 2학년 1, 2학기와 3학년 1학기다. 대형 고교와 작은 고교의 격차는 이 세 학기에 진행되는 교육과정의 밀도에서 더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A고교 2학년이라면 1학기 때 인공지능 수학을 수강하고 2학기 때 인공지능 기초 수업을 통해 인공지능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어필할 수 있다. 영어는 1학기 때 미디어 영어, 2학기 때 심화영어로 이어진다. 제2 외국어의 경우 1학기 때 스페인어, 일본어, 한문을 배우고 2학기 때 스페인어 회화, 일본어 회화, 한문 고전으로 연결된다. 이공계로 진학하려는 학생이라면 1학기 때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을 듣고 2학기 때 역학과 에너지, 물질과 에너지, 세포와 물질대사 등으로 심화한다. 두 학기 동안 학생이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학생부에 고스란히 적힌다.
B고교의 경우 1학기에는 물리학만 편성돼 있고, 2학기에야 생명과학, 지구과학을 들을 수 있다. 화학은 3학년 1학기다. 두 학교 학생이 대학 입학사정관에게 내밀 학생부의 내용과 질이 다르다.
고교 규모에 따른 수업 선택권 격차는 전국적 현상이다. 교육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고교학점제 운영 개선 대책’에서 고교 1100곳의 수업 편성 상황을 조사한 내용에서 드러난다. 현 고2가 12개 학급 이하 소규모 학교를 다닐 경우 고교 3년 동안 평균 84.5개 과목을 접할 수 있다. 13~24개 학급 규모의 중간 규모는 97.2개, 25학급 이상에선 99.3개다. 학교가 농산어촌(군 지역)에 있으면 85.9개, 도시(시·구 지역)에 위치하면 98.6개다.
학교 격차 두고 ‘개문발차’ 고교학점제
교육부는 격차를 줄여나간다는 입장이다. 교육부는 “공동교육과정과 온라인학교를 통해 학생들이 선택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며 “공동교육과정 등에 교원 777명을 올해 배치하고, 소규모학교 학생이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도록 강사 채용 예산 157억원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격차가 있으니 현재 예산 지원 등으로 보완하고 있다는 뜻이다.
온라인학교는 개별 학교에서 개설하기 어려운 소인수 과목을 실시간 쌍방형 수업으로 제공하는 학교다. 고교학점제 도입에 맞춰 시도별로 개설돼 있다. 공동교육과정은 여러 학교 학생을 거점학교 한 곳에 모아 수업하는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현재 고2에게 대입은 현재 진행형이다. 수시 전형에 영향을 주는 학생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작성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학교와 공동교육과정이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온라인학교의 경우 수강 인원이 지나치게 적어 개설하기 어려운 특수한 수업의 경우에 한정해야 한다. 교사가 진행하는 오프라인 수업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반 과목까지 확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공동교육과정은 농산어촌 소규모 학교들이 물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져 있어 비효율이란 비판이 많다.
게다가 온라인학교와 공동교육과정을 통해 취득하는 성적은 절대평가(성취평가)로 산출된다. 여러 학교에서 다양한 수준의 학생이 모이므로 상대평가일 경우 수업 개설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입에서 절대평가로 산출한 성적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큰 학교에서 상대평가로 산출된 성적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다.
한 지역 교육청 관계자는 “고교 수업의 질이 유지되지 못하면 결국 학생이 도시로 갈 수밖에 없어 지역 소멸은 가속화된다. 작은 고교들을 통폐합하거나 남고와 여고를 합치고, 거점 학교를 집중 지원하는 등 학교 규모 적정화를 더 이상 미루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단기적으로는 주요 대학들이 온라인학교와 공동교육과정에서 수강한 성적에 불이익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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