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이순재는 생전 “나이 먹었다고 어른 행세하고 대우받으려 주저앉으면 늙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남기곤 했다. 촬영장에서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 배우, 스태프에게도 한 번도 짐이 되지 않으려는 배우로 유명했던 그의 철학은 한 후배 배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했다. 바로 배우 김영철에게 큰 울림을 준 드라마 <공주의 남자> 촬영장의 일화다.

당시 환갑을 앞둔 59세였던 김영철은 성격이 급해 촬영 대기 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스태프들에게 화를 내던 시절이었다. 제작진 사이에서도 “김영철은 항상 1순위로 찍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예전처럼 1순위로 촬영을 하고 쉬는 시간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낯선 차 한 대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안에서 이순재가 대본을 품에 안고 쪽잠을 자며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김영철이 “선생님, 이렇게 불편하게 계시지 말고 먼저 찍으시죠”라고 하자 이순재는 단호하면서도 따뜻하게 말했다. “괜찮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너희 먼저 찍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더 충격적이었다. 이순재는 전날 밤 10시부터 촬영장에 도착해 있었고, 김영철이 그를 발견한 시각은 새벽 3시. 그 후에도 5시간을 더 대기해 동이 틀 무렵에서야 촬영을 마쳤다. 원로 배우에게 촬영을 앞당겨주는 것이 관례임에도 그는 평소에도 늘 후배들에게 순서를 양보했다고 한다. 드라마 촬영 당시 김영철은 59세였고 이순재는 80을 바라보고 있는 78세의 고령이었다.


그날 이후 김영철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한 방송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며 그날 이후 ‘나를 바꾸자’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촬영장에서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스태프에게 화를 내는 일도 사라졌고, 내가 아닌 팀을 위하고 후배들을 배려하는 선배 배우로 거듭났다

이순재는 살아생전 누구보다 엄격하고 누구보다 따뜻한 어른이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는 사람이었고, 그 진심은 수많은 후배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의 마지막까지 성실했던 태도와 흔들림 없는 인품은 그가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배우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한국 드라마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영원한 현역’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나우무비 에디터 김무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