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빈자리를 '생존자들의 이야기'로 채워갑니다

김명근 2024. 11. 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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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자살예방센터 <2024 세계자살유족의 날 기념 공모전> 우수상 작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임에도, 자살에 대한 논의를 일상에서 찾기 어렵다. 자살자를 '공동체의 금기를 어긴 위반자'로 보는 시각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개인의 자살 생각을 자유로이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자살 문제를 신속하고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다.

자살 논의를 막는 사회는 자살자 뿐만 아니라 '자살 유족이 겪는 트라우마' 문제도 잊히게 한다. 전문가들은 자살 유족의 심리적 고통이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해, ‘자살 생존자’라고 부른다. 일부 유족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고립된 삶을 택하고 있다. 죄책감, 분노, 억울함 등 복합적인 감정을 함께 안으며 말이다.

올해 11월 23일, '세계자살유족의 날'은 자살자와 유족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날이 됐으면 한다. 이 작품은 자신의 아픔이 다른 사람의 아픔과 만나며 치유되는 과정을 그린 '짧은 글짓기'다. 생존자들이 서로 합심하여 자살자의 빈자리를 메워가는 여정이 죽음을 이해하는 일이자, 자신의 회복을 돕는 길이란 점을 알리고 싶었다. <기자말>

[김명근 기자]

 세계자살유족의날 행사장(제주삼다종합사회복지관)에 게시된 '유족권리장전' 내용이다.
ⓒ 김명근
"지옥 간 사람에게는 기도 못 해줍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못 견뎌 교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먼 옛날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살인을 '모살'이라 규정했습니다. 그중 당신 아들의 '자살'도 유죄에 포함됩니다.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교인들조차 나의 아들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삶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죗값이라며 나를 등졌습니다. 만인에게 평등하다던 종교는 사실 자살자나 그 유족들에게 덜 평등했습니다. 나는 비참함을 감추기 위해 입을 다물고 우는 법을 익혔습니다.

아들이 죽은 이후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서 살았습니다. 사회는 가족이 자살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죽음을 부르는 자'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따라 죽었어도 "이럴 줄 알았다"며 그 죽음은 존중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런 자살 유족을 빗대어 '자살 생존자'라고 부릅니다.

얼마 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살유족 자조 모임'을 찾았습니다. 이제까지 그런 모임을 피한 건 아픈 사람끼리 모이면 더욱 무력해질 것 같아섭니다. 고통을 나눠봤자 그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만 늘어날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누군가 나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 생존자가 된 후 처음으로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끅끅" 울음을 삼키다가, 그들이 건넨 휴지 한 장에 입을 열고 통곡했습니다.

"잘못된 교리를 따르는 교회로군요."

한 중년 남성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아픔을 이용하지 않은 교회니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합시다. 종교는 자살자를 배척할 수 있어도, 그 유족까지 거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말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나의 삶을 위로받을 뿐 아니라, 아들의 죽음도 온전히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답했습니다.

"우리는 아드님의 죽음을 이해합니다. 다만 자살을 포용하지 않는 이들을 당장에 설득하거나 동정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은 자보다, 생존자인 당신의 치유가 제일 중요합니다. 당신과 아들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반평생, 아들의 행복을 곧 제 삶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때, 한 노모가 비탄에 빠진 내게 위로를 건넸습니다.

"아들이 자유로이 선택한 죽음에 다른 사람이 부여한 의미를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들이 선택한 길이지, 부모가 이끈 죽음이 아닙니다."

노모는 아들의 죽음이 단지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자살 때문에 아들이 살아온 삶 전체가 폄하돼서는 안 된다고 전했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슬픔이 논리로만 '치유'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여러 말을 더하기보다, 손을 맞잡는 방식으로 공감하며 나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나의 죄들이 보였습니다. 지난 몇 년간 그가 왜 죽었는지, 그를 둘러싼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파헤치는 데 일상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산 자는 결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던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가장 부정한 사람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이 포기한 삶은 그의 것이지, 나의 몫이 아닙니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때로는 다시 슬픔에 잠길 것입니다. 후회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미래를 향하는 희망을 찾고, 지금을 살아간다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이제 나는 아들이 없어도 맛있게 밥을 먹습니다. 아들이 없어도 즐겁게 여행 다닙니다. 사소한 것들에 웃을 힘이 있고, 만물을 사랑할 너그러움도 있습니다.

이제 아들의 빈자리를 '생존자들의 이야기'로 채워갑니다. 나의 슬픔과 그들의 슬픔이 맞닿을 때 나의 고통은 조금씩 덜어집니다.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이 합쳐질 때 내 안의 죽음은 조금씩 비워집니다. 나의 죽음과 기억 너머 아들의 죽음이 옅어질 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내 아픔을 치유한 것은 또 다른 이들의 아픔이었습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슬픔을 공부하는 것은 결국 슬픔의 몫일지 모릅니다. 이제 아들의 빈자리는 '나의 삶'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자살유족의날 행사장에 들린 관객들이 자살유족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 김명근
 '2024 세계 자살 유족의 날 기념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탔다.
ⓒ 제주자살예방센터
 세계자살유족의날 공모전 시상식을 하고 있다.
ⓒ 김명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주자살예방센터에도 실립니다.당일 <서귀포삼다종합사회복지관>에서 수상식과 전시회를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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