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영의 아내 백정화입니다, 이제 남편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요 [민병래의 사수만보]

민병래 2026. 6. 8.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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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4년 수감 생활 "이재명 잡으려 남편에게 죄 덮어씌워"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 <기자말>

[글쓴이: 민병래(작가)]

▲ 이화영의 아내 백정화 그는 남편을 옥바라지하다 검찰과 맞대거리하고 있다.
ⓒ 민병래
요즘 자주 꾸는 꿈 얘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분명 감옥 안이었습니다. 양복을 차려입은 대여섯 명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더군요. 한 명은 쇠조끼를 또 다른 한 명은 입마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겁이 났지만 한발 한발 다가가 쇠창살 사이를 들여다봤습니다. 양복쟁이들은 덩치 큰 누군가를 들어 침대에 눕혔어요. 바둥거리는 그의 손발을 단단히 묶더군요. 지시를 하는 사람은 "이번 일만 메이드하면 알지, 서둘러, 서둘러"라고 했어요. 나는 한발을 내디뎌 쇠창살을 짚고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바닥에는 구정물이 그득했어요. 심한 악취가 감옥 안에 팽팽하더군요. 묘하게도 양복쟁이들의 구두는 흙탕물 속에서도 반짝였고, 침대에 눕혀진 사람의 배에선 피가 뿜어져 나오는 데도 와이셔츠의 깃은 하얗게 빛나더군요. 나는 창살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손바닥 길이만큼의 폭이라 넣을 수 없었습니다. 깨금발로 안을 보려 바둥거렸는데, 양복쟁이들은 쇠조끼를 입히고 배 깊숙이 관을 꽂더군요. 그들 사이로 팔뚝이 어른거리는데 털이 수북했어요. 순간 안도했죠. 남편이 아니라 곰이구나, 쓸개에 관이 꽂혀, 즙을 빨리는 곰일 거라고! 그런데 꿈틀대는 발에는 낯익은 남편의 구두가 보였어요. 나는 소스라쳐 그만하라고 악을 썼죠. 목울대는 움직이고 입을 크게 벌리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이런 얼개의 꿈을 아마 수백 번이나 꾸었을 겁니다. 어떤 날은 아들과 무릎 꿇은 채 검사에게 사정하고 어떤 날은 딸과 눈물을 흘리며 빌었죠. 남편을 풀어달라고. 손을 부여잡고 바짓단까지 붙잡습니다. 애원하다 얼굴을 들어 검사들을 쳐다보면 눈, 코, 입이 없었어요. 가면을 썼는지, 원래 그런 얼굴이었는지 꿈속에서도 궁금했죠. 자다 깨고 다시 잠들고 깨고 일어나면 베갯잇은 땀범벅인, 그런 날을 4년 가까이 보냈어요.

불행한 인연

내 남편, 이화영은 죄가 커요. 경기도의 평화부지사나 킨텍스의 대표이사를 할 때 쌍방울의 사외이사를 하면서 받았던 법인카드를 계속 쓴 건 분명 잘못입니다. 본인이 만든 동북아평화경제협회의 업무를 위해 썼다 해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또 아들이 계약직이나 쌍방울그룹에 속한 기획사에서 잡지 업무를 담당한 점도, 이십 대의 취업난을 생각하면 송구한 마음입니다.

남편은 2004년 총선에서, 3선 의원인 이상수가 대선 자금 문제로 구속되자 그를 대신해 중랑구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죠. 남편은 2008년 임기가 끝났을 때 이상수에게 "옥에 계신 동안 지역구를 잘 관리해 출소하면 넘겨드리겠다"라고 한 약속을 지켰어요. 당시 주변의 만류가 컸습니다. 저도 남편에게 "노동부 장관도 했고 세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으니 이제 후배를 키워달라고 이상수를 설득해 보라"라고 했으나 남편은 고개를 젓더군요.

결국, 2008년부터 경기도의 평화부지사가 되기까지 10년 동안 부평초처럼 살았습니다. 2010년의 강원도지사 민주당 경선에서, 2012년 동해·삼척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 2016년 총선에서 거듭 고배를 마셨죠. 수입 없이 정치 활동을 하는 세월이 이어졌습니다.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죠. 그렇게 곤궁한 시절, 쌍방울과 연결되었습니다. 김성태 회장은 알려진 것처럼 2010년 쌍방울을 인수해, 정·관계의 끈을 만들려고 하던 터라 남편에게 사외이사 자리를 제안했죠. 한 달 300만 원 정도 급여를 받았습니다.
 '대북 송금'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이 지난 4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정권 정치검찰 조작기소 의혹 사건 종합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목을 축이고 있다.
ⓒ 남소연
어느 순간 쌍방울이 "대북사업 추진을 내세워 주가 부양을 꾀"했으니 통일외교위 간사였고 뒤에 경기도청의 평화부지사가 된 남편이 쓸 만했겠죠. 쌍방울이 기업의 최소 원칙이라도 지킨 그룹이었다면, 남편이 사외이사를 하고 보수를 받은 게 흠은 아니었겠으나 돌아보니 불행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직으로 복귀해서는 관계를 정리함이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평화부지사라는 현직에 올라가서도 쌍방울의 법인카드를 사용했으니, 원칙을 잃은 몸가짐이었습니다. 4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아내로서 부끄럽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리고, 이 부분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지금 톡톡히 대가 치르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의 생일날, 사라진 남편

남편이 구속된 날은 하필이면 친정엄마의 생신날이었어요. 함께 점심 식사하고 남편은 수원지검으로 들어갔죠. 바로 그날 영장이 청구되고 발부되었습니다. 담당 변호사가 놀라더군요. 1차 수사 결과를 검토하지도 않고 한두 차례 재소환하는 절차도 생략한 걸 보니 기획 수사의 냄새가 난다고 했어요. 조짐은 있었죠. 수원지검으로 출두하기 전, 남편이 대표이사인 킨텍스로 압수수색이 들어왔습니다. 압수수색을 앞두고 남편은 조선일보 기자의 전화를 받았어요. 대뜸 "쌍방울의 법인카드 받아 쓴 게 있죠?"라고 물었다고 해요. 남편은 당황했죠. 아무래도 조선일보이니 검찰이 정보를 흘렸다고 판단했고, 모종의 음모가 다가옴을 느꼈어요. 이미 변호사비 대납 사건으로 검찰이 쌍방울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하던 터라 걱정이 컸습니다.

남편은 쌍방울의 법인카드를 썼다고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 및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2022년 9월 28일 구속됐습니다. 그렇게만 기소되었으면 죗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징역 살고 새 출발할 수 있었겠죠. 웬걸 가시밭길의 서막이었어요. 검찰은 거듭 남편을 압박했죠. "쌍방울이 경기도가 북에 지급해야 할 돈을 대신 냈고 이를 남편이 이재명에게 보고했다"라는 진술을 원했어요. 검찰은 구속한 뒤 2주 후에 기소하고 1심 구속 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에 "김성태와 공모해 북에 자금을 보냈다"라고 외국환거래법위반으로 기소하고, 다시 6개월이 지나서 증거인멸교사혐의로 추가 기소했어요. 검찰은 1심 재판이 끝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남편의 심신을 망가뜨렸습니다.

본인만 압박한 게 아닙니다. 나까지 소환했어요. "쌍방울로부터 받은 자금을 내 통장으로 빼돌렸다"라는 혐의를 걸더군요. 2019년에 첫째가 결혼하며 받은 축의금과 보험금 등이 내 계좌에 있었는데 모두 범죄 수익으로 몰아갔습니다. 여섯 차례나 내게 소환을 통보하고 세 번이나 집을 압수 수색했어요. 핸드폰은 두 번이나 빼앗기고. 나중에 참고인에서 피고인이 되었습니다. 또 친구이자 경기도청에서 함께 근무한 신명섭 평화협력국장을 구속했어요. 신명섭에게도 '북에 보낸 묘목 중 금송이 이재명이 방북하려고 북의 통일전선부에 준 뇌물이다'라는 진술을 요구했어요. 신명섭은 거부하다 직권남용혐의로 구속되고 말았지요. 심지어 검찰은 변호인까지 압수수색하고 기소했습니다. 정말이지 남편을 향한 전방위 압박이었습니다(관련기사: 이화영의 친구 신명섭입니다, 조작기소 실체를 밝힙니다 https://omn.kr/2hx6o).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검찰은 아들까지 수사선에 올렸어요. 아들은 근무 특성상, 현지 출근이 많았는데 출근부에 도장이 없다며 받은 월급이 이화영에게 가는 뇌물 아니냐고 추궁당했죠. 회사의 동료들이 근무 사실을 증언해 줘 혐의는 벗었으나 화를 완전히 피하진 못했어요. 아들이 4학년 1학기에 취업했는데, 담당 교수는 '취업계'를 내고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으면 출석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이 대학 측을 조사하자 담당 교수는 "검찰에서 전화받았다. 실제 출석은 안 했으니 졸업은 안되는 걸로 처리하겠다"라고 했어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아들이 첫 번째로 수원지검에 출두한 날 검찰청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더군요. 거의 열 시간이 가까워서야 아들이 지친 어깨로 나왔습니다. 우리 부부가 당하는 고통은 감내하겠는데 아들마저 시련을 겪으니 정말 수원지검을 들어 메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이 무렵 저는 더욱 악몽에 시달렸는데 그날도 잠자리가 사나웠습니다. 남편과 저, 아들까지 갇혔는데 예의 얼굴 없는 양복쟁이들이 "행복한 국민, 정의로운 검찰"이라는 깃발을 흔들며 우리를 둘러쌌어요. 나는 저 깃발만큼은 없애버려야겠다고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어요. 아들이 출두했던 날이 남편이 구속된 날보다 더 힘겨운 날이었습니다.
▲ 이화영의 아내 백정화 그는 4년째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
ⓒ 민병래
변호사 수임료에 6억 가까운 추징금, 20만 쪽이 넘는 수사기록

남편이 구속된 뒤 돈도 원 없이 써봤습니다. 공소장과 증거기록을 합하면 20만 쪽이 넘으니, 남편의 사건을 맡은 변호인은 여기에만 매달려야 하고 기록을 보려면 밤을 새워야만 했습니다. 체력이 안 되거나 발병된 암이 확인되어 사임한 변호인도 있고, 기존에 수임받은 사건을 그만둘 수 없어 병행하다 사임한 사람도 있습니다. 남편을 위해 고비마다 애써 준 변호인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이들의 노고에 상응하는 수임료가 무척 컸습니다. 검찰이 남편의 '범죄혐의'를 일괄 기소했으면 사건기록도 한꺼번에 검토하고 변론 방향도 일관되게 세울 수 있었겠죠. 그런데 자고 나면 추가 기소를 하니, 변호인들은 당황했고 재판 전략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법원에서 등기만 날아오면 심장이 쿵쿵대고 가슴이 뒤틀렸습니다.

변호사 수임료만이 아니라 6억 원 가까이 되는 벌금과 추징금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저희가 면목동에서 살았는데, 2016년 용인에서 출마할 때 남사에 전셋집을 얻었습니다. 벌금과 추징금을 못 내니 면목동 집을 검찰이 압류하더군요. 남사의 집 전세를 빼서 조금 싼 집을 구하고 남는 돈으로 벌금 일부나마 내려 했습니다. 처인구에 집을 얻어 계약금을 내고, 면회하러 가서 남편에게 집을 옮긴다고 말했죠. 그 사실이 보고 되었나 봐요. 남사 집의 전세금을 검찰이 바로 압류하더군요. 집주인은 압류가 되어 전세금을 빼줄 수 없다고 하고 새로 이사를 할 처인구의 집주인은 이미 받은 계약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했어요. 3천만 원을 날릴 수 없어 이리저리 돈을 빌려 일단 입주하고 곧바로 집을 내놓았습니다. 복비에 이사비용, 세 집의 관리비까지 두 딸과 아들이 보내주는 돈과 제가 요양보호사를 하며 받는 수당으로 사는 처지에 원 없이 돈을 쓰고 있네요. 다행히 남편의 억울함에 공감하는 후원 덕에 2억 5000만 원의 벌금과 추징금 3억 2595만 원을 모두 냈습니다.

남편과 맺은 인연, 친구에서 부부로, 부부에서 동지로

남편은 2022년 9월 구속되어 벌써 4년이나 수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징역은 힘들지요. 덩치 큰 남편은 더위에 맥을 못 춥니다. 수원구치소가 낡은 시설이라 냉방은 기대할 수 없죠. 요즘 여름이 불볕더위인 데다 달궈진 콘크리트의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아 밤에도 잠을 못 이룬답니다. 스트레스로 변에서 피가 묻어나온다고 할 때, 시아버님도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터라 가슴이 철렁했어요. 게다가 경계성 당뇨 상태이니 하루하루가 불안한 마음입니다.

이제 4년에 가까운 징역을 살았으니, 쌍방울의 법인카드를 쓴 잘못에 대해선 어느 정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나요. 9년 6개월이라는 징역형은 이재명을 잡으려고 덮어씌운 '외국환관리법'이나 '제3자뇌물죄'에서 비롯되었으니 이젠 풀려나야 하지 않나요.

저는 1981년 성대에 입학해 국문과에서 공부했습니다. 남편과는 성대의 이념 서클인, '휴머니스트'에서 동기로 만났죠. 남편은 2학년 때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낙서 투쟁을 하다가 정학 처분을 당했고 3학년 때는 학내 시위를 주동해 구속되었습니다. 저도 선배들을 쫓아다녔으나 아버지가 경찰 간부인지라 조심스러웠습니다. 이화영이 1984년 출소하고 우리는 노동현장으로 갔어요. 나는 반월공단에서 화영이는 안양에서 활동했죠. 나는 의치를 만드는 레진공장에서 일당 4500원을 받으며 일했고 남편은 화천프레스에서 수습공으로 일했습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우리는 서로 어깨를 기댔고 1988년 결혼했습니다.

친정엄마는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며 집만큼은 해주시겠다고 900만 원을 내주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집 대신 동태찌개 집을 하겠다고 나섰어요. 남편은 화천프레스에서 허벅지가 찢기는 산업재해를 당해 현장 일을 멈춘 상태였습니다. 남편은 노동상담소 같은 단체도 중요하지만, 지역 노동자가 소주 한 잔 편히 마실 공간도 필요하다며 '골목식당'을 내자는 생각이었죠. 장모로선 기가 막혔겠죠. 집을 사라는 돈으로 동태찌개 집을 차리면 십중팔구 까먹을 테고 딸자식은 동태탕을 끓이며 고생할 게 뻔하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나, 맑고 순수한 청년 시절 남편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증언하는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지난 4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정권 정치검찰 조작기소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현장 활동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기술도 없고 산업재해를 당한 데다가 제가 첫 애를 갖게 되니 손가락 빠는 처지가 되었어요. 제가 산달을 앞두고 있을 때 선배의 소개로 남편이 이상수 의원실에 인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상수 의원은 당시 노무현·이해찬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라 불릴 정도로 활약이 컸습니다. 그는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답게 현대중공업이나 대우조선 파업 현장을 찾아 다니고, 노동악법 개정에 힘을 쏟았지요. 남편이나 저는 노동 현장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국회 활동으로 펼쳐나가게 되니 기쁨이 컸습니다.

의원실 생활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휴머니스트 활동을 같이 한 친구 김현동을 찾아 연변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족 취업 사기 피해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저와 남편은 그곳에서 무너지는 조선족 사회를 접했고 '고난의 행군' 시기에 만주 일대를 헤매는 북녘의 동포를 만났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남편은 초선의원 시절인 2004년, '연해주고려인이주 140주년' 행사를 지원하고 우수리스크에 '고려인문화회관'을 짓는 일에 땀을 흘렸습니다. 한반도경제평화협회를 만든 것도 이런 취지였고요. 돌아보면 정말 아쉽습니다. 동태찌개 집을 하겠다고 장모 앞에서 철없이 말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자신을 쓰려는 곧은 마음을 유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잘 알려졌듯 남편은 수원지검이 술까지 마시게 하며 진술 모의훈련을 시키던 2023년 5월, 많이 흔들렸습니다. 저와 아들까지 조사받고 친구 신명섭이 구속되고 정치적 아버지인 이해찬까지 구속하겠다는 협박이 나오던 시점입니다. 그 무렵 면회 가면 남편은 눈을 안 마주쳤어요. "내가 곧 나갈 거다, 검사와 잘 얘기가 되고 있다"와 같은 뜬금없는 말을 했어요. 남편이 검찰에 포획된 것을, 법정에서 진술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죠. 그때 저는 일어나서 "이화영 정신 차려"라고 소리쳤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만일 이화영이 그대로 무너져 검찰이 원하는 진술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편은 비리 정치인이며 검찰에 부역한 배신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았겠지요. 남편은 의지를 다시 세웠고 이제는 검찰의 조작 기소를 알리려 싸우고 있으니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그날 이후 저도 옥바라지를 하는 백정화에서 검찰과 맞대거리하는 백정화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문득 대학 4학년 시절이 떠오르네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교육선전물 제작을 하던 때였죠. 거리시위에 나갔다가 연행된 적이 있어 집에서는 저를 단속하기 바빴는데, 이 활동도 부모님이 눈치를 채셨어요. 친정엄마는 애원했죠. 아버지 앞길을 망치지 말라고. 급기야 당신들은 이대로 두면 "딸아이 인생이 망가진다"며 어느 날 접골원에서 사람을 불러 제 다리에 석고붕대를 감았어요. 저는 아버지가 출근하고 엄마가 빨래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석고붕대를 칼로 자르고 창문을 넘었어요. 한참을 달리다 보니 맨발이더군요. 마침 거리 평상에서 어떤 사람이 신발을 벗고 낮잠을 자길래 훔쳐 신고 뛰었죠. 저는 그날 친구들을 불러내 학교 앞에서 막걸리 잔을 들고 무용담을 늘어놨어요.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이 기가 막히셨을 거예요. 친정엄마는 내가 반월공단에 있을 때 딸자식을 찾겠다고 김치를 싸 들고 여러 날 공단 거리를 헤매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넋두리처럼 "이 서방이 빨리 나와야 할 터인데"하며 사위 걱정을 하시니 우리 부부는 걱정만 끼쳐드렸네요.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 이화영의 아내 백정화 그는 4년째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
ⓒ 민병래
이 거짓의 시대가 내 온몸과 우리 가족에게 석고붕대를 칭칭 감았으나 부서뜨리고 가겠습니다. 지금 남편은 제 남편만이 아닙니다. 검찰의 악행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남편을 비리 정치인으로 꾸짖되, 끝없이 쓸개즙을 빨리고 있는 처지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주먹만 한 작은 쓸개에 관이 대여섯 개나 꽂혀, 즙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몸이 팍팍해진 60대 중반의 중늙은이입니다.

6월 8일부터 또다시 기소된, 이름하여 '국회 위증'건으로 국민참여재판이 시작되네요. 지난주에도 면회를 다녀왔어요. 사식도 들여보내고 영치금도 넣어줬어요. 그리고 두꺼운 면회실 유리창에 대고 소리쳤죠

"이화영! 우리 무릎 꿇지 말자!"

화영이는 씩 웃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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