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부가 일선부대에 배포한 충격의 간행물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지난 3월 2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9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사를 듣고 있다. |
ⓒ 연합뉴스 |
민족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등의 논리를 내세운다. 한국전쟁 전후에 민간인 학살을 많이 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피학살자들이 공산 빨갱이와 연관됐다'는 등으로 받아친다.
국회 반민특위의 친일청산을 훼방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런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없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는 논리로 대응한다. 한편, 독립운동을 방해해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대응 논리가 부각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1919년이 아닌 1948년에 두는 건국절 논리를 통해 임시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간접적 접근법이 현재까지는 두드러진다.
이승만 옹호 세력이 가장 크게 곤란을 느끼는 부분은 아무래도 1960년 4·19혁명이다. 이승만을 옹호하려면 이승만을 몰아낸 4·19의 가치를 떨어트려야 하는데, 이것만큼은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 시절의 1980년 헌법을 제외한 1963년 이후의 역대 헌법 전문에 4·19가 명기됐다. 이 점 때문에도 4·19를 섣불리 비판하기 힘들지만, 꼭 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20세기의 올드라이트와 달리 21세기의 뉴라이트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앞세워 3·1운동을 간접적으로 부정한다. 헌법 전문에 명기된 3·1운동에 대해서도 생채기를 내고 있으니, 이들이 오로지 헌법 전문이 무서워 4·19를 부정하지 못한다고 보기는 힘들 듯 같다. 이승만의 선거부정과 실정이 너무도 명백한 데다가 어린 아이들까지 시위에 나서서 이승만을 하야시킨 일이 커다란 논리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자유>는 성우안보전략연구원에서 발간하는 월간지로, 국방부가 일선 부대에 정기적으로 배부하는 ‘안보간행물’ 5종 중 하나다. |
ⓒ 부승찬 의원실 |
"4·19 직후 대통령이 한 말을 들어보자. '불의를 보고 방관하지 않는 100만 학도와 국민들이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승만 대통령의 나라 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 <자유> 2024년 4월호, pg.95. “다큐 영화 <건국전쟁>에서 본 기억과 기록”. 박태식 |
ⓒ 부승찬 의원실 |
이처럼 이승만 옹호 세력은 이승만을 4·19 책임과 떼어놓는 한편, 그를 4·19 흐름에 얹어놓고 있다. 실은 이승만도 4·19를 지지했다는 헛소리 같은 변명을 하고 있다. 위 <자유>는 그런 접근법에 기초해 있다. 비슷한 설명이 다큐영화 <건국전쟁>에서도 있었다. 이 영화는 4·19 때 이승만이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1960년 4월 27일자 <대한뉴스>는 이승만이 23일 오후 서울대병원을 방문해 부상 학생들을 위로하는 동영상을 보여준다. 영상은 이승만의 눈시울이 뜨거워진 장면을 비춰주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이 대통령은 학생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서 침통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최선의 치료를 해주도록 병원 당국자에게 당부했습니다."
이승만이 서울대병원을 찾아가기 나흘 전, 그가 사는 경무대 앞에서 처참한 비극이 벌어졌다. 공공법인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홈페이지는 4·19 상황을 날짜별로 보여주는 코너에서 경무대 앞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11시 50분경 동국대생들이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과 조선총독관저였고 당시에는 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현 청와대) 쪽으로 향하면서 시위 양상은 바뀌었다. 다른 대학 학생들과 동성고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부터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실업자·구두닦이·신문팔이 등도 데모에 합세했다. 오후 1시 40분경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일제히 발사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2시 50분경에는 중앙청 부근 무기고에서 경찰의 무차별 발사로 8명이 숨졌다."
경무대 앞에서 발포가 일어나 21명이 희생되고, 경무대 바로 밑의 중앙청 부근에서 발포가 일어나 8명이 희생됐다. 이 정도로 총소리가 많이 났는데도, 그날 경무대 입주자는 총격을 제지하지 않았다.
장덕환 4·19혁명정신선양회 공동대표의 <한국의 4월혁명>은 경무대 앞 상황을 설명하면서 "경찰의 총기 난사는 광란의 그것으로 변했다"고 기술한다. 광란으로 표현될 정도로 총소리가 많이 났는데도, 이승만은 발포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서울대병원을 찾아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1층에 '이승만 하야'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때 연설 장면이다. |
ⓒ 윤성효 |
매카너기는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대사, 민심은 나한테 있어요"라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되기 전에 폭도들을 통제할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를 잘했어요"라며 학생과 시민들에 대한 발포를 합리화했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좌우간 오늘 학생들이 죽은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몇 명이나 죽었죠?"
이승만은 국회 본회의 같은 데서 "다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비쳤지만, "너는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는 한국전쟁 전후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뿐 아니라 측근 살상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해방 직후의 서북청년단 활동가인 김성주는 백범 김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았을 정도로 이승만과 긴밀했다. 그러나 그가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의 선거운동을 돕고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비판하자, 이승만은 그를 재판에 넘긴 뒤 은밀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군사재판이 막바지에 다다른 1954년 5월 김성주에게 징역 7년이 구형되자, 형량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은 헌병사령관 원용덕에게 '그냥 죽일 것'을 지시했다. 1991년 3월 29일자 <한겨레>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63: 김성주' 편에 따르면, 4·19 뒤에 원용덕 집에서 발견된 이승만의 영문 밀서에는 "너는 잔말 말고 즉시 내 명령대로 처단하라"는 살해 지시가 적혀 있었다.
이승만은 위선의 눈물을 얼마든지 흘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을 의롭게 포장하는 변명의 논리를 퍼트리고자 윤석열 정권이 10억 이상을 들여 국방부 간행물을 일선 부대에 배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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