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이합체시(일명 세로드립)

로마제국 시절,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은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에 숨어 지냈다. 두 개의 곡선을 겹쳐서 만든 물고기 문양을 일종의 암호로 이용했다. 그리스어로 물고기는 ‘익투스’(ΙΧΘΥΣ)인데,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Ιησούς Χριστός, Θεού Υιός, Σωτήρ)라는 신앙고백에서 각 단어 첫 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했다. 물고기가 기독교 상징이 된 연유다.
서양의 시 형식 중에는 시구의 첫 글자를 모아 숨은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게 있다. 이를 이합체시(離合體詩, Acrostic)라 한다. 미국 낭만주의 시인 에드거 앨런 포(1809~49)는 제목부터 ‘이합체시’(An Acrostic)인 이합체시를 썼다. ‘엘리자베스, 당신이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사랑하지 않음”-매우 달콤한 방법으로 그것을 음미할 수 있다/…’. 시의 각 행 첫 글자를 모으면 시의 첫 단어 ‘엘리자베스’(Elizabeth)가 된다.
이합체시는 낯설지 않다. 삼행시 등 ‘n행시’ 놀이가 그 일종이다. 송년회 자리의 건배사 등으로 삼행시를 짓곤 한다. 201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삼행시 놀이가 유행했다. ‘반갑습니다/기호 1번/문재인입니다’.(반기문) ‘이 보세요/재차 생각해도/명쾌한 답은 문재인’.(이재명) ‘유일한 희망/승리의/민주당 문재인’.(유승민) 기승전 ‘문’은 결국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이처럼 말놀이를 재미로만 볼 수는 없다. 그 속에 민심이 담겼기 때문이다.
자유경제원은 2016년 3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을 주최했다. 이승만 호를 딴 ‘우남찬가’라는 시가 입상했다. ‘한 송이 푸른 꽃이 기지개를 켜고/반대편 윗동네로 꽃가루를 날리네/…/학자이자 독립 열사였던 이승만 선생의 역사이니/살아라, 그대여. 이 자랑스런 나라에’. 각 행 첫 글자를 모으면 ‘한반도 분열, … , 보도연맹 학살’이었다. 세로로 읽도록 내용을 숨겨 ‘세로드립’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필명 진인(塵人) 조은산이라는 이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시무 7조 상소문’이 화제다. 반발도 없지 않지만, 공감이 크다. 글 속에 김현미 국토부 장관, 조국·추미애 전·현직 법무부 장관, 이해찬 민주당 전 대표 이름의 이행시가 숨어 있었다. 말놀이 속 민심도 허투루 보지 말라. 2017년 대선이 준 교훈 중 하나다.
장혜수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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