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삼국지
동탁과의 싸움이 흐지부지 끝난 191년, 원소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황하 이북 지역(허베이)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랴오둥의 공손찬이 허베이를 공격했다. 공손찬은 강력한 세력을 보유한 원소보다 기주자사 한복과 유주자사 유우를 목표로 삼았다. 원소는 이 상황을 이용해 한복과 유우를 도와줬고 한복을 동원해 황족인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 계획이었다. 문제는 유우가 도무지 원소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 원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 한복을 협박해 기주를 통째로 빼앗으며 허베이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다시 역사에 등장한 조조
▷청주 황건적 격파로 재기
192년 4월 두 가지 큰 사건이 동시에 터진다.
장안에서는 사도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고 동탁의 잔존 세력이 반발하면서 이각과 곽사의 난이 발생했다. 원소는 당장 장안으로 진군하고 싶었을 터. 하지만 허베이에는 원소와 유우, 공손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공손찬은 당시 가장 강했고 유우는 나름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192년 2월에는 원소가 위치한 지역의 남쪽 청주 지역에서 황건적의 잔당(청주적)이 대규모로 봉기했다. 4월 무렵 청주적은 100만명으로 불어나 연주를 침공해 연주자사 유대를 살해했다.
원소는 꿈이 크고 머리가 빨리 움직이지만 늘 용기가 따라주지 못하는 유형이다. 갑자기 터진 돌발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유대가 전사하자 연주 사람들은 원소에게 구원을 청하려 했다. 유대의 신하 중 포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포신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대담한 성격이었다. 이전에 동탁이 뤄양에 들어왔을 때 원소에게 동탁을 제거하라고 주장했던 이가 그였다. 원소의 우유부단함을 알고 있던 포신은 원소가 연주를 구할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포신은 난세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세력보다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주 사람들에게 의외의 인물을 추천했다. 반동탁 전쟁 때 망신만 당하고 당시 하내군(하남성 정주 북쪽 지역)에 겨우 천 명의 병력만 거느리고 있는 조조였다.
조조가 연주에 도착했지만 난민 수준이던 청주적은 유대를 꺾은 기세를 타고 그 세력이 확산되고 있었다. 포신은 조조를 인도해 청주적과 격돌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조조가 승리했지만 포신은 전사했다.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조조는 청주적을 추격해 모두 항복을 받아냈다. 민간인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았고 남은 사람 중 정예병을 추려 자신의 군대로 삼았다. 이들이 훗날 조조의 주력군으로 큰 명성을 떨치는 청주병이다. 포신의 헌신 덕분에 조조는 떠돌이 풍운아에서 졸지에 자기 영지를 가진 군벌로 탈바꿈했다.
연주를 차지했지만 조조는 안심할 수 없었다. 사방에 황건적과 독립 군벌, 지방호족, 한나라 관료가 난립하는 상황이라 연주 전체를 확고하게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조조가 연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안전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조조는 견성을 골랐다. 견성은 황하 연변의 도시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황하가 흐른다. 북쪽과 서쪽이 강으로 보호받고, 북쪽으로는 허베이성, 동쪽으로는 산둥성으로 가는 십자로에 위치한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면 조조가 근거지로 견성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원소와 조조의 동맹
▷본격적인 군웅할거의 시작
원소는 조조의 성공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소는 어머니가 천인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자랐다. 명문 귀족 원씨 집안에서는 나름 입지전적인 노력을 한 인물로 꼽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공자의 한계가 명확했다. 귀공자가 아니라 흙수저 출신이라고 해도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무슨 일이든 자신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게 되는 증상이다. 원소도 처음에는 조조의 성공이 꺼림칙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원소는 조조의 성공이 자신에게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조가 청주병을 거두던 192년 겨울, 원술과 원소 사이가 벌어졌다.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결국 원술은 공손찬과 동맹을 맺고 남북에서 원소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공손찬은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자신에게 도망쳐 온 유비를 평원군으로 내려 보냈다. 원술은 서주의 도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근거지인 난양을 떠나 막 조조가 차지한 연주 지방으로 북상한다.
그래서일까. 원소는 조조가 자리 잡은 것이 고마웠다. 즉시 조조와 동맹을 맺었다. 조조는 원소의 요청을 받은 즉시 움직여 전해와 유비를 공격했다. 조조는 원소와 달리 발 빠르게 움직였다. 원술은 유비를 때맞춰 구원하지 못하고 다음 해(193년) 봄이 돼서야 연주로 진입했다. 원술의 숙적인 형주의 유표가 원술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진군이 늦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술군은 봉구와 광정을 점거하고 조조를 위협했지만, 조조는 간단하게 원술군을 격파했다. 도망치는 원술을 끝까지 몰아붙여 화이허 건너편 구강현까지 밀어냈다.
당시 조조와 원소의 행동을 보면 두 사람 차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원소는 발해와 기주를 차지했지만 자신은 사방에 강력한 적에게 포위돼 있다고 한탄하면서 버티고만 있었다. 약한 자를 보면 집어삼켰지만 강자를 보면 자신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최선의 목표를 탈취하려고 움직이기보다 피해를 보지 않거나 최악의 상황만 피하려고 애썼다.
반면 조조는 말만 연주목일 뿐이지, 소유한 지역은 견성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청주병을 동원해 원술을 몰아내고 연주를 휘저었다. 원술을 몰아낸 후 군량 부족 등의 영향으로 전쟁 수행 능력이 극도로 부족했음에도 바로 서주의 도겸을 향해 칼날을 돌린다.
원소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는 것일까. 조조는 난민 수준 황건적 잔당을 상대했던 것에 불과하다. 원소는 공손찬이라는 강력한 군대와 대치 중이었다. 같은 황건적 잔당 중에서도 북방의 흑산적은 청주적과 규모와 위력이 달랐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소의 군대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고간을 파견해 반유목 지역으로 후한 말 최강 군단을 배출해 온 병주를 장악했다. 유우와 공손찬은 피말리는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소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휘몰아치는 전쟁과 약탈, 파괴 속에서 차세대 영웅으로 보였던 원소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반대로 전반적인 평판이 좋지 않았던 조조는 난세의 영웅이 될 자질을 드러냈다. 적어도 최고의 지력을 지닌 인재들에게 이 차이는 확실했다. 순욱과 곽가, 견성 인근에 살던 정욱 같은 조조 최고의 모사들이 이 시기를 전후해 자진해서 조조에게 귀순한다. 순욱과 곽가는 일족이 다 원소에게 등용돼 있었음에도 원소를 버리고 조조에게로 왔다. 원소와 조조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86호 (2020.12.02~12.0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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