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문제의 허위를 알려주는 친일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김백일의 모습. |
ⓒ 위키미디어 공용 |
'빨치산'은 혁명적 신념을 가진 전사의 이미지도 연상시키지만, 한국에서는 부정적 이미지와 훨씬 많이 결합돼 있다. 2011년에 <역사비평> 제94호에 수록된 김진환 건국대 연구교수의 논문 '빨치산, 역사의 격랑에 선 사람'은 우리 사회에 유포된 빨치산 이미지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비인간적인 빨치산'은 반공정권과 토벌 군경이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 시민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싶어했던 빨치산의 전형이다. 토벌작전이 계속되고 있던 1954년 지리산에서 토벌 당국의 적극적 후원으로 촬영된 <피아골>은 빨치산을 살인과 강간을 서슴지 않는 잔혹한 인간상으로 그려냈고, 이후 영화 <남부군>이 나오기 전까지 빨치산 관련 영화들은 <피아골>에서 묘사된 빨치산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부정적 이미지로 점철된 빨치산의 반대편에는 이승만 정권의 토벌 군경이 있었다. 이들은 반공 이념으로 무장한 체제 수호자의 모습으로 각인돼 있다.
이런 그림은 흔히 한국 사회의 극단적 좌우 대립을 설명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하지만, 빨치산 문제의 본질이 다른 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진압군 사령관이 있다. 서울현충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묘소 위쪽인 장군1묘역에 누워 있는 김백일이 그런 증언을 역설적으로 하고 있다.
▲ 친일파 김백일의 묘, 서울현충원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
ⓒ 김종훈 |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은 그가 빨치산과 싸울 때의 직함이다. 한국 빨치산의 주류가 지리산에 있었을 때, 그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이었다. 토벌 군경의 수뇌부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 시기인 1949년 10월 18일, 사령부 장교들을 대동한 그는 전북 남원에 있는 지리산 기슭의 여관에서 동아일보사 최흥조 기자와 좌담회를 가졌다. 이 상황을 정리한 그달 22일자 <동아일보> 기사 '소탕 전야의 지리산 답사기'는 빨치산 문제의 본질이 좌우 대결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절 신문에는 등장인물의 성명을 한번에 밝히지 않고 본문에서는 성만 밝힌 뒤 괄호에서 성명을 다 밝히는 기사들이 많았다. 위 기사는 좌담회에 모인 장교들의 이름을 그런 방식으로 소개한다.
"전투 지휘복장 그대로 모인 장교들은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김(김백일) 대령을 비롯하여 공(공국진) 소령, 함(함준호) 대령, 박(박승일) 중령, 김(김용기) 소령, 김(김기용) 대위, 조(조재미) 중령, 이(이관식) 중위, 박(박종길) 대위, 오(오익경) 소령들이다."
위 기사는 간부들의 이름을 소개한 직후, 그들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1년 전 여수·순천 진압 작전에 참가하였던 이들은 자못 감개무량한 듯 당시의 정형을 무한한 감회에 잠기어 술회하였다"고 말한다. 여수·순천 주민들과 국군 제14연대가 일으킨 여순사건(여순항쟁)을 진압한 장교들이 빨치산 진압부대인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의 중핵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 이후의 빨치산 형성이 여순사건과 관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홍조는 김백일 등이 들려준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다. 최흥조는 그것을 기초로 지리산 빨치산 대원들의 출신 성분을 분류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지리산 빨치산은 무장반도와 비무장반도로 양분했다. 그는 무장반도들을 이렇게 요약했다.
"무장반도: 국군 제14연대 반란군 잔존부대와 민간 출신 무장폭도 및 야산대."
최흥조는 빨치산 대원들의 출신성분을 설명하면서 여수 제14연대를 가장 먼저, 가장 비중 있게 언급했다. 이는 그에게 현지 상황을 들려준 김백일 등이 여순사건과 빨치산의 연속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위 기사에도 언급됐듯이 이들은 여순사건 1주년 전날인 10월 18일에 모임을 가졌다. 이 역시 최홍조와 김백일 등이 여순사건과 빨치산을 연결지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주민들과 제14연대가 궐기한 것은 제14연대에 내려진 제주 4·3 진압명령이 부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출신들과 함께 항쟁에 나선 이들은 분단정부는 수립되지 말아야 하며 친일청산은 훼방받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래서 진정한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심정으로 제주도민들을 응원했다. 동일한 심정으로 4·3항쟁에 나선 제주도민들이 옳았다는 판단하에 그들은 여순사건을 일으키고 뒤이어 빨치산 투쟁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단순히 좌파가 좋고 진보가 좋아서 지리산에 들어간 게 아니라, 분단을 반대하고 친일청산을 촉구하고자 그렇게 했다는 점은 빨치산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타당하지 않음을 웅변한다. 이 문제가 빨치산 대 군경, 빨치산 대 우익의 대결이 아니라 독립운동세력 대 친일세력의 대결, 통일운동세력 대 분단세력의 대결이라는 특성을 띠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 2019년 3월 1일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
ⓒ 윤성효 |
위 석판은 "만주 간도 연길에서 태어났다"라며 "일찍이 군사학을 닦아 해방된 조국에 환국"했다고 말한다. 그가 해방 이전에는 별 이력을 남기지 않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이 석판에 일제강점기 경력이 담기지 않은 것은 그 좁은 석판에 담기에는 그의 이력이 너무 길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선의의 해석을 해줄 수도 있다.
석판에 담기지 않은 그의 활약상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4권 김찬규 편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찬규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백일은 그가 해방 뒤 북한을 거쳐 월남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세상이 다 붉은 색으로 물들어도 나 혼자만은 반공에 입각하여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김백일(金白一)로 개명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일(一)에는 '하나가 되다'의 의미도 있으므로 백일과 같은 삶을 한결 같이 이어가겠다는 의미로 그렇게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적개심을 표시한 '붉은 색'은 일본제국주의가 빨갱이로 규정한 항일세력이다. 이 세력에 대한 진압 활동에 참여한 것이 그가 친일파로 규정된 핵심 사유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1937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를 졸업하고 이듬해 3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면서 "1938년부터는 간도특설대의 창설 요원으로 참여하여 간도성 일대의 항일무장부대 공격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백선엽' 하면 떠오로는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가 김백일의 부대였다. 항일투사 소탕을 전문으로 하는 그 부대에서 임관 1년 뒤부터 부역했던 것이다. 지리산에 모인 빨치산들을 소탕하는 그의 모습과 비슷한 양상이 1945년 이전에도 있었던 셈이다.
<친일인명사전>은 그의 1939~1943년 활동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장백산(백두산) 지구의 동북항일연군을 공격해 조선과 중국 두 민족의 항일투쟁을 진압하는 데 종사했다"고 설명한다. 백두산 지역에서 항일 빨치산을 진압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은 친일파들이 주축이 된 여순사건 이후의 한국 군부가 그를 지리산 빨치산 진압에 투입한 이유 한 가지를 시사한다. 그런 그가 빨치산과 싸운 것은 한국의 빨치산 현상이 항일세력 대 친일세력의 대결임을 보여주는 유력한 사례 중 하나다.
김백일은 19세 때인 1936년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중앙육군훈련처에 입교해 장교 수업을 받고 이듬해 11월부터 만주국군 장교로 부역하면서 항일 빨치산들을 공격했다. 1945년까지 9년간 만주국 녹봉으로 친일재산을 모아가면서 빨치산 공격에 참여했던 것이다.
해방 뒤 그는 백선엽과 함께 남하해 1946년에 미군정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고 뒤이어 국군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경력과 특기를 살려 빨치산 진압에 참여했다.
김백일은 빨치산 문제의 본질을 자신의 삶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낸 친일파다. 1951년 3월 28일 대관령에서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그는 한강 뷰가 확보되는 서울현충원에서 1966년 10월 6일부터 지금까지 편안히 누워 있다.
덧붙이는 글 | 그런 산악지대와 함께 연상되는 남한 빨치산의 모습은 이들이 곧 패배할 집단이라는 느낌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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