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의 해양 이야기] ‘선박의 무덤’ 드레이크 해협, 과학자에겐 최고의 실험실

기후 시스템 가늠할 중요 단서 제공
크릴 풍부 황금 어장이자 생태 보고
모험의 바다가 이젠 과학의 바다로
가끔은 해양 조사 항해의 기억을 떠올린다. 남아메리카 최남단 칠레의 케이프 혼과 남극 북쪽 사우스셰틀랜드 제도 사이, 폭 약 800㎞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해상 관문, 드레이크 해협(Drake Passage). 2009년 4월 1일 이른 아침, 남극반도에서 떨어진 엘리펀트 섬 서쪽 해역에서 마지막 관측을 마치자 평균 수심 약 3500m의 그 해협은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태풍에 맞먹는 강풍이 몰아쳤고, 파도 높이는 8m를 훌쩍 넘었다. 흰 거품을 뿜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1만2000t급 독일 쇄빙연구선 폴라슈테른호조차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배는 겨우 5노트(시속 약 9㎞)로 전진했고, 조타실은 치솟는 파도의 풍경을 지켜보는 이들로 붐볐다. 선원과 탐험가들이 두려워했던 지구에서 가장 거친 바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곳. 드레이크 해협은 마지막까지 통과 의례처럼 우리를 시험했다. 수많은 선박과 생명을 삼킨 바다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그날 온몸으로 실감했다.

이처럼 거친 바다가 형성되는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위도 30~60도의 중위도는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편서풍대에 속한다. 특히 남반구는 이를 가로막을 대륙이 거의 없어 바람은 바다를 길게 가로지르고, 그 결과 파도는 거침없이 커진다. 여기에 더해 드레이크 해협 위도대는 차가운 남극 공기와 따뜻한 북쪽 공기가 충돌하는 극전선이 형성되는 부근으로, 대기가 불안정하고 저기압이 자주 지나간다. ‘포효하는 40도, 격노하는 50도, 절규하는 60도’라는 표현이 나온 배경이다. 드레이크 해협은 그중에서 절규하는 60도에 놓여 있다. ‘위도 40도 아래에는 법이 없고, 50도 아래에는 신이 없다’라는 19세기 케이프 혼 항해자들의 속담에 빗대어 ‘60도 아래에는 인간이 없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바다가 거칠어질 때면 인간은 다만 견뎌야 할 존재가 된다. 이 혹독한 바다는 오래전부터 항해자들의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해 왔다. 드레이크 해협이라는 이름 또한 그런 항해의 역사 속에서 붙여졌다.
이 해협의 이름은 16세기 영국의 탐험가이자 해적선 선장으로 더 알려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에서 유래한다. 그는 세계 일주 항해 중 1578년 남아메리카 대륙과 티에라델푸에고 사이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뒤 폭풍에 떠밀려 남쪽으로 내려가며 남아메리카 아래에 또 다른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 해역의 존재를 최초로 인지한 사람은 스페인의 항해사 프란시스코 데 호세스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25년 마젤란 해협 남쪽의 이 바다를 기록으로 남겼고, 스페인 지도에서는 ‘호세스의 바다(Mar de Hoces)’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드레이크 해협은 항해자들에게 거친 항로였지만 과학자들에겐 지구 최대 해류의 심장을 읽는 관측 창구로서 연구 해역이 되어 왔다. 이곳은 남극을 한 바퀴 도는 남극순환류가 가장 좁게 모여 지나는 길목으로, 이 해류의 세기와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자연의 실험실이다. 여기에 연구선의 접근성이 좋아 장기 관측 자료가 축적된 해역이기도 하다.
남극순환류는 전 세계 강물 총 유출량의 100배가 넘는 수송량을 지닌다. 이 거대한 흐름은 태평양·대서양·인도양을 연결하는 ‘해양 순환의 허리띠’이며 열과 염분, 탄소를 재분배해 지구 기후를 조율한다. 남극순환류는 남극을 둘러싸고 흐르기 때문에 따뜻한 해수가 남쪽으로, 찬 해수가 북쪽으로 이동되는 것을 막고 있다. 남극 대륙 주변 바다를 보호하는 방호벽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하부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심층수가 남극 대륙 주변으로 공급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편서풍이 강화되고 해양 열 저장이 증가하면서 이 심층수는 대륙붕 해저를 따라 대륙 주변의 빙붕 아래로 더 쉽게 스며들고, 그 결과 빙붕의 밑면 녹음이 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륙 빙하를 붙잡는 지지력이 약해져 빙하 감소가 빨라지는 원인이 된다. 드레이크 해협은 단순한 항로를 넘어 남극순환류의 자료로부터 기후변화의 신호를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는 기후 관측소가 된다. 이곳에서 감지되는 수송량과 수온 등의 작은 변화는 남극 얼음과 전 지구 해수면, 더 나아가 기후 시스템 전반의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드레이크 해협의 중요성은 순환과 기후 연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해역은 남극 수산업에서도 빠지지 않는 해역이다. 대륙 주변의 차고 무거운 물이 가라앉고 그 보상으로 깊은 바닷물이 솟아올라 영양염이 공급되면서 식물플랑크톤이 번성하고, 이를 먹는 크릴이 대규모로 분포한다. 크릴은 고래·물개·펭귄뿐만 아니라 메로로 알려진 남극이빨고기와 같은 어종의 먹이다. 드레이크 해협은 해양 생태계와 수산에 중요한 동시에 국제기구인 남극해양생물자원보존위원회가 엄격한 어획 쿼터와 보호구역 제도를 관장하는 매우 민감한 해역이다.
이제 이곳은 과학과 어업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을 시험한다. 1914년 인듀런스호의 좌초와 극적 생환으로 잘 알려진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톤의 회고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열한째 날, 폭풍 속에서 우리는 거센 파도와 싸우고 있었다. 걷힌 구름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집채만 한 파도의 물마루였다. 배는 물에 잠겼으나 간신히 버텼고, 다시 바다와 맞섰다.” 작은 구명 선박인 제임스케어드호가 엘리펀트 섬을 떠나 드레이크 해협에 들어선 후의 장면이다. 그에게 이 해협은 파도에 견디며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대였다.
오늘날 여름이 되면 드레이크 해협에는 남극의 갈라지는 빙벽을 보려는 크루즈선과 이를 연구하는 과학조사선이 오간다. 한때는 파도를 견디는 것이 과제였다면 이제는 변화하는 기후를 마주해야 하는 바다가 되었다.
이재학 한국해양한림원 석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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