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반도핑기구가 미·중 긴장 사이에 끼게 된 이유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미국과 중국 간 지정학적 긴장이 올림픽 무대로도 번지며 자신들이 “부당하게 중간에서 휘말리게 됐다”고 주장한다.
미국 측이 WADA가 중국을 감싸주고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가운데 중국의 간판 수영 선수들은 여러 차례 도핑 의혹에 휩싸이며 주목을 받고 있다.
파리에 도착한 중국 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은 다른 국적의 선수들에 비해 2배나 더 잦은 도핑 검사를 받았는데, 이는 중국 선수들의 경기력을 방해하려는 음모가 아니냐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WADA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자신들이 “패권국 간 지정학적 긴장 상태 한가운데에 휘말리게 됐지만, 여기에 동참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피츠제럴드 WADA 선임 대변인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특정 사람들이 도핑 의혹을 받는 선수들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점수를 얻고자 한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반도핑 시스템엔 불신과 분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역 전쟁, 지정학적 경쟁, 중국의 러시아와의 우정 등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다.
이러한 긴장 상황이 스포츠 경쟁판까지 이어지는 건 그리 놀랍지 않지만, 이젠 그 갈등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는 모양새다.
WADA 측은 지난주 “명예 훼손” 혐의로 ‘미국 반도핑기구(USADA)’에 대한 법적 소송 제기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USADA는 WADA와 ‘중국 반도핑기구(CHINADA)’가 “(도핑 검사 후) 양성 반응이 나온 사례를 은폐하고,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더러운 손”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미국 의원들도 나서 WADA가 중국 수영 선수들의 도핑 의혹에 대해 적절히 조사하지 않았다며 비난한다. 지난 30일엔 WADA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할 수 있는 권한을 미 행정부에 부여한다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피츠제럴드 대변인은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이 기술의 세계인 반도핑 영역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끼워 넣으려 하면, 더 이상 과학적이고 법적인 분석이 아닌 정치적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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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및 영양 보충제로 인한 오염
지난 30일 WADA가 성명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미 ‘뉴욕타임스’는 이전엔 공개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해 보도했다. 올해 올림픽 대표팀으로 출전한 선수 1명을 포함해 중국의 수영선수 총 2명이 도핑 의혹으로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두 선수는 2022년 금지된 스테로이드성 약물에 양성 반응을 보였으나, 출전 허가를 받았다. CHINADA는 이에 대해 선수들이 오염된 햄버거를 먹으며 자신도 모르게 스테로이드를 섭취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USADA는 WADA가 중국이 “남들과는 다른 규칙에 따라 경쟁하도록 내버려두는 식으로 불공정하게 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WADA는 자신들의 결정을 옹호했다. 선수들의 영양 보충제와 모발 검사에서 음성 결과가 나왔으며, 두 선수 모두 양성 반응을 보인 1번의 검사 전후로 제출한 대조군 샘플에선 음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선수 모두 1년 이상 출전 정지를 당했으며, 이번 사건은 종결됐다고 덧붙였다.
WADA는 이 두 선수의 사례는 “각기 다른 스포츠 종목의 (중국) 선수들이 연관된, 광범위한 여러 사건”의 일환이라면서, “사건의 수를 고려하면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샘플 오염 문제가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WADA는 지난 6월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고기를 먹은 선수들이 종종 도핑 검사에서 금지 약물인 클렌부테롤에 대한 양성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농가에서 가축 성장 촉진제로 사용하기도 하는 물질이다.
뉴욕타임스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발표된 해당 성명에서 WADA는 중국뿐만 아니라 멕시코, 과테말라 등 여러 국가의 오염 사례 또한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올리비에 니글리 WADA 사무총장은 미국 언론이 “육류를 통한 오염 문제는 여러 국가에서 이슈가 되고 있음에도, 오직 중국에 대해서만 의문을 제기한다”고 지적하며, 이는 “반도핑을 정치화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는 뉴욕타임스가 지난 4월, 2021년 도쿄 올림픽을 몇 달 앞둔 시점에 중국 수영선수 23명이 경기력 향상 약물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하며 더욱 논란을 불렀다.
하지만 중국 당국이 이는 음식 섭취를 통한 오염된 결과라고 발표하면서 선수들은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30명으로 구성된 중국 수영 대표팀은 당시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 3개 등 총 6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성 판정을 받은 23명 선수 중 11명은 이번 파리 올림픽을 위한 대표팀으로도 선발됐다.
중국 선수 23명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이후 미국 수영 선수이자 이번 올림픽에서 개인 통산 12번째 메달을 목에 건 케이티 러데키는 반도핑 규제 당국에 대한 자신의 신뢰는 “역대 최저”라고 말했다.
그러나 WADA는 조사 결과, 심장 혈류량을 증가시키는 트리메타지딘(TMZ)이 검출된 원인이 “오염이라는 가능성을 반증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테스트를 받은 선수들의 “TMZ 농도가 일관되게 낮았으며, 도핑 패턴이 없다는 점” 또한 이러한 오염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즉, 며칠간 이어진 테스트 결과가 일관되지 않고 음성과 양성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독립적인 조사 결과, WADA는 사건을 부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선수들에 대한 편견을 보이지도 않았다.
두 패권국의 대결
이 스캔들로 인해 반도핑 기구 당국은 더 강한 압박에 시달리게 됐으며, 중국 수영 대표팀은 이번에 파리에 도착해서 평소보다 훨씬 더 잦은 검사를 받고 있다.
수영 등 수상 스포츠 종목을 총괄하는 행정 기구인 ‘세계 수영 연맹’에 따르면 올해 1월 이후 중국 대표팀 소속 선수 31명은 다양한 반도핑 기관으로부터 평균적으로 21차례 테스트받았다.
이에 비해 호주 선수 41명은 평균 4차례, 미국 선수 46명은 평균 6차례 검사받았다.
이렇게 중국 선수들에 대한 도핑 테스트가 잦아지면서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중국 관영 언론 ‘환구시보’는 서방 세력이 “중국 수영 대표팀을 방해하고자 도핑 테스트를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상하이에서 국제 정치학을 가르치는 셴이 교수는 환구시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전 세계 반도핑 규정을 지배하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비윤리적이며 끊임없는 검사”로 인해 중국 대표팀의 훈련에 차질이 생겼으며, 이는 “올림픽의 망신”이라고 지적했다.
남자 평영 200m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중국 수영 선수 친하이양은 이번 도핑 테스트는 “최근 몇 년간 유럽과 미국이 중국 대표팀의 실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친 선수는 중국의 SNS인 ‘웨이보’를 통해 “경기 전 중국팀의 준비 흐름을 방해하고, 우리의 심리적 방어벽을 무너뜨리고자 일부 속셈을 쓰고 있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다”고 적었다.
지난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남자 평영 50m, 100m, 200m 부문 금메달을 목에 건 친 선수는 지난 28일 열린 올림픽 평영 100m 결승에선 7위에 머물렀다.
중국의 간판 다이빙 선수 출신인 가오민은 엄격한 테스트가 “중국 수영 대표팀을 방해했다”며 친 선수가 이번에 “지난 2년간 출전한 대회 중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고 강조했다.
현재 중국 수영 선수팀은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 동메달 4개를 획득했다(한국시간 8월 2일 기준).
도쿄 올림픽 여자 100m 접영에서 은메달을 딴, ‘나비 여왕’으로도 불리는 장유페이는 지난달 30일 파리 올림픽 여자 100m 접영에서 동메달에 그치며 눈물을 흘렸지만, 도핑 테스트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고 했다.
도핑 테스트가 “약간 성가시긴 했다”는 장 선수는 경기 부담감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고 설명했다.
추가 보도: 애나벨 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