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신선놀음은 옛말…‘10초 바둑’ 시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바둑이 ‘10초 바둑’일 것이다. 인터넷 바둑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젊은 고수들은 다들 10초 바둑을 둔다. 한 수를 두는데 10초를 넘기면 바로 시간패를 당한다. 수읽기도, 손도 빨라야 하기에 웬만한 실력자들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10초 바둑은 프로지망생이나 프로강자들의 놀이터이고 훈련장이다. 구경꾼들은 10초 바둑이 싫지 않다. 자신이 둘 때는 30초도 숨이 턱턱 막히지만, 구경할 때는 신기하게도 10초도 여유가 있다.
국내 최대 바둑대회인 KB바둑리그가 10초 바둑을 도입한 지 두 달이 흘렀다. 정확히 말하면 〈1분+10초 피셔 방식〉이다. 피셔 방식은 체스에서 차용한 것인데, 대국자가 빨리 두면 시간을 저축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처음 1분, 그다음 한 수마다 10초를 주는데 3초 만에 착수하면 7초를 저축할 수 있다. 남은 시간은 1분 7초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저축해도 그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바둑이 중반에 접어들면 저축은 금방 바닥나고 결국 매수 10초 안에 두어야 한다.
10초란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상대가 두자마자 하나, 둘, 셋 하고 쫓아오는데 빛의 속도처럼 느껴진다. 빠른 착수 말고도 유념할 것들이 더 있다. 당황해서 돌을 떨어뜨리면 거의 진다. 바둑돌을 놓은 손으로만 시계를 누를 수 있다. 다른 손으로 누르면 반칙패. 사석을 들어낼 때는 조심해야 한다. 10개 넘는 돌을 10초 안에 들어내긴 힘들다. 자칫 판 위에 사석을 남기면 반칙패를 당한다.
KB바둑리그는 왜 이렇게 고문에 가까운 대국 방식을 채택했을까. 바둑리그의 인기(시청률)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한국기원에서 대책 회의가 열렸는데, 피셔 방식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프로들은 1분 초읽기는 59초에 두고, 30초 초읽기는 29초에 둔다. 이게 몸에 배 습관이 됐다. 재미도 없고 대국 시간은 자꾸 늘어난다. 피셔 방식은 이 문제를 해결해줬다. 바둑리그 외에도 국내 23개 대회가 이 방식을 채택한 이유다.
왜 10초 바둑이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선 격론이 있었다. 전통적인 바둑은 깊은 사색 속에서 수를 찾아낸다. 제한시간 각 40시간으로 6개월을 끈 슈사이 대 기타니의 대국은 『명인』이란 소설로 탄생해 오랜 세월 향기를 풍긴다. 그러나 10초 바둑은 사색이 필요 없다. 오직 번개 같은 수읽기와 감각이 주 무기다.
대책회의에 참석한 박정상 9단은 “10초 바둑이 바둑의 전통·품격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10초 바둑 효용론이 우세했다. 바둑리그는 5판으로 승부를 가리는데, 그동안은 1~2판만 중계가 가능했다. 10초 바둑은 5판 모두를 보여줌으로써 승부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실제 10초 바둑 이후 바둑리그 유튜브 시청률이 50% 가까이 늘었고 바둑TV 상황도 엇비슷하니 일단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0초 바둑은 바둑팬 사이에서도 찬반이 거세다. 중국리그는 제한시간이 1시간 반~2시간이다. 세계대회에 딱 맞춰 운영한다. 이에 비할 때 한국리그의 10초 바둑은 세계대회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걱정한다. 또 10초 바둑은 오직 TV중계만을 위한 이벤트라는 비난도 있다. 허나 ‘쇼츠’나 ‘짤’이 범람하며 인기를 끄는 시대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TV가 바둑 한판으로 4~5시간을 때우는 방식에 팬들은 식상해 한다. 바둑도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상황이 10초 바둑을 탄생 시켰다.
서봉수 9단은 “10초 바둑은 너무 빨라 음미할 시간이 부족하지만 지루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익숙해지면 10초나 20초나 같다”고 말한다. 이렇게 바둑도 슬슬 변해가는 것일까. 신선놀음과 썩은 도낏자루(爛柯)의 세상을 떠나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인가.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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