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전시회 연 정부, 수상한 커피잔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기자]
요즘 인기 있는 운동, 탁구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이 1924년이었다.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탁구가 세계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71년이었다. 1971년 4월 6일 열린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미국 선수단이 4월 10일부터 17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총리와 면담을 가졌다. 이들 미국 선수단의 아침 식사에도 커피는 빠지지 않았다고 해외토픽이 전했다.
미국 선수단은 중국의 주요 도시를 순방하며 탁구 경기를 가졌다. 이해 7월에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 그리고 이듬해 2월에는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른바 핑퐁외교였다.
▲ 1972년 1월 10일 자 <경향신문> 기사 "한국의 외국인기업 (1) 한국IB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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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 지역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에 진출하는 외국인 기업도 증가하였고, 이들 외국인 기업에 대한 관심도 점차 커졌다. <경향신문>은 1972년 1월 10일부터 '한국의 외국인기업' 연재를 시작하였다.
첫 번째 기업은 '한국IBM'이었다. 한국인 사이에 컴퓨터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1967년 초 한국에 진출한 컴퓨터 회사 '한국IBM'은 5년간 지속적으로 적자 상태였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에게 컴퓨터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교육투자를 지속하고 있었다. 한국식 이름 '나문선'을 명함에 새기고 다니던 한국IBM 사장 '라스무슨'씨의 말대로 "미완성의 수요"를 개발하고 있었다.
1월 11일 자에 실린 두 번째 외국인 기업은 1970년 8월에 미국 기업 AMI의 투자에 의해 설립된 전자부품 회사 '대한마이크로전자' KMI였다. 두 개의 전자제품 회사에 이어 1972년 1월 13일 자에 소개된 기업은 맥스웰하우스 커피를 제조 판매하는 미국의 식품회사 '제너럴푸드'(GF)였다.
1970년 9월부터 커피 판매를 시작한 이 회사의 투자 비율은 동서식품이 66.5%, GF가 33.4%였다. 당시 GF가 진출한 25개 국가 중에서 한국만이 합작투자였을 뿐, 일본을 포함한 나머지 24개국은 모두 GF가 100% 투자하여 직접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은 특이한 점이었다. 사장이 한국 사람이었던 배경이다. 물론 기술원조를 담당했던 GF에서 부사장, 이사, 공장장 등 세 자리를 차지하고 커피의 생산과정을 엄밀히 관리하였다. 판매 부문에도 직접 관여하였다. 세 명의 외국인 임원은 미국인이 아니라 모두 일본GF에서 파견된 일본인이었다.
GF가 한국에 커피 공장을 세운 것은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지만, 미국의 자본도 중국의 차문화를 커피문화로 바꾸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커피 사업이 성공한 것은 광고 덕분이기도 하다. GF는 동서식품에 대해서 판매액의 일정 비율을 광고비로 사용할 것을 계약서에 명시하였다. 광고를 게재할 신문사를 결정하는 것도 파견된 일본인 임원들이 결정하였다.
공격적인 광고 전략
당시 우리나라가 비록 다방 붐, 마담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커피 소비량이 세계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1인당 커피 소비 1위 국가는 스웨덴으로 1년에 1115잔을 마셨다. 미국은 789잔으로 세계 5위였던 것에 비해 한국은 26잔을 마실 뿐으로 미국의 1/30 수준이었다. 1972년 말에 이르면 한국의 1인당 년 커피 소비량은 29잔으로 일본의 31잔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서구 국가들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양이었다.
동서식품이 커피의 생산과 판매를 시작한 지 2년 만인 1972년에 국내 커피 시장의 50%를 점유하게 된 것은 GF의 공격적인 광고 전략의 효과였다. 판매 시작과 함께 신문마다 맥스웰하우스 커피의 '짙은 향기 구수한 맛'을 강조하였고, 인스턴트커피 판매를 시작한 1970년 12월부터는 '언제 어디서나 안심하고 사실 수 있는 맥스웰하우스 인스턴트커피'를 내세웠다.
1972년 6월부터는 영화배우 김진규가 등장하여 '시원한 맥스웰아이스커피'를 광고하면서 여름 음료수 시장까지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맛이 아니라 광고로 커피를 판매하고, 맛이 아니라 브랜드 이름으로 커피를 선택하는 미국의 커피 소비문화가 범람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서식품이 맥스웰하우스커피를 생산하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1972년, 경쟁 기업이 등장하였다. 1972년 7월 20일, 미주산업이 홍콩으로부터 브라질산 원두를 수입하고, 독일로부터 로스팅 기계를 수입하여 7월 말부터 커피를 생산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미주산업은 동서식품과 커피 시장을 놓고 20년 정도 경쟁을 벌이면서 인스턴트커피의 유행에 이바지하였다.
▲ 1971년 9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 "차 한잔이 214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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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커피의 역사에서 1970년대 초는 '알 커피'라고 부르던 레귤러 커피와 '가루 커피'라고 부르던 인스턴터 커피의 자리바꿈이 벌어진 전환기였다. 1971년 9월 25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알 커피가 소비량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방 등 유흥업소에서는 주로 알 커피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머지 10%가 인스턴트 커피였는데, 이는 주로 가정용이었다. 동서식품에 이어 미주산업의 인스턴트 커피까지 등장하면서 커피는 더 이상 끓여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타서 마시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미국식으로 편리성을 위해 맛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달짝지근한 커피 레시피 등장
당시 매우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렸다. 상공부가 주최한 이른바 '시작품(試作品)전시회'였다. 세계의 우수 상품을 잘 모방한 회사를 뽑아 상을 주는 전시회였다. 1972년 11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덕수궁에서 열렸다. 이름이 '시작품전시회'지, 실은 짝퉁 전시회였다.
세계의 우수 상품 1146점과 국내기업이 이를 모방하여 만든 시작품 1205점이 비교 전시되고 있었다. 이런 전시회를 정부가 주최한 것은 세계 제일의 우수 상품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게 함으로써 국내기업의 기술 수준을 높여주고, 수출상품의 고급화를 유도하자는 목적이었다.
이 전시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서독의 '티어쉔로이드' 도자기를 흉내 낸 밀양도자기가 받았다. 상공부장관상을 받은 제품 중에는 서독 '두마' 제품을 모방한 국내 기업 '세라아트' 공예의 커피잔도 포함되었다.
▲ 1973년 1월 5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코리아나호텔 커피숍 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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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짝지근한 비엔나커피가 최초로 광고에 등장한 것이 1973년 1월 5일 자 <조선일보> 코리아나호텔 커피숍 광고였다. 이 신문에는 '나이는 만으로, 몇 살 몇 달까지 부르게'라는 주부클럽연합회 캠페인 기사가 실렸다. 실제로 이렇게 변하기까지 50년이 걸렸다.
명동 소재 다방 '가무'에서 비엔나커피를 팔기 시작하여 청춘남녀들을 길거리에 줄 세우기 시작한 것은 2년 후인 1975년이었다. 가격은 일반 커피의 여섯 배였다. 인스턴트커피의 유행에 따라 이즈음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하였다. 1973년 2월 8일 서울시청 시민홀이었고, 1잔에 30원이었다.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1970년-1973년 기사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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