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는 어른, 얼마나 귀한가"…동생과 고구마 팔던 감독이 던진 메시지[인터뷰]
류승범과 고구마 팔던 감독 ‘쌍천만 조준’
‘1편 1000만 흥행’ 무거운 어깨
“사회 정의란 인간적 도리 지키는 삶”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현실을 반영한 영화들이 최근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그런데 영화 ‘베테랑2’은 결이 조금 다르다. 9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영화는 사적 복수로 악인에게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는 게 온당한지 묻는다. ‘나쁜 살인이 있고, 좋은 살인이 있냐’는 황정민의 대사에서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류승완 감독은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주먹이 운다’(2005) ‘짝패’(2006) ‘부당거래’(2010) ‘베를린’(2013) ‘모가디슈’(2021)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위선적 민낯을 가리켜온 극장 영화 연출자다. 상업영화, 그가 말하는 ‘대중영화’란 외피를 씌웠지만, 그 속에 보일 듯 말 듯 주제의식을 심는 솜씨가 탁월했다. ‘베테랑2’는 그동안 그가 만들어온 작품과 결이 좀 다르다. 그래서 꽤 흥미롭다. 그에게 9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 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류 감독을 만났다.
“내 안의 분노는 정당한가” 류승완이 달라진 이유2015년 개봉한 ‘베테랑’은 거대 재벌인 빌런을 응징해 쾌감을 안기며 1341만명을 모았다. 류 감독은 “1편은 당시 투자배급사의 ‘1번 영화’도 아니었고, 개봉도 밀렸었다. 목표도 크지 않았는데 기록적인 관객수를 동원했다. 게다가 사회적 현상으로 작용하며 뉴스에 자료화면으로 나오더라”고 떠올렸다. 그는 “1편이 소비되는 방식이 괴로웠다”며 1편 당시 내 안의 어떤 분노가 작용했고, 결국 제가 사적복수를 해버린 거였다”고 털어놨다.
류 감독은 “시간이 흐르고 보니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었더라. 진짜 가해자의 실체를 보고 스스로 섬뜩했다. 타점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나를 옹호하며 합리화하고 있더라. 그때 ‘내 안의 분노가 정당한가’ 자문했다. 내 ‘정의’는 객관적인가. 가치 기준이 잘못된 건 아닌가. 맹목적 신념은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른 걸 하고 싶었다”고 했다. 2편에서 정의가 신념과 충돌하는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다.
그래서일까. 1편에서 ‘사이다’를 건네던 영화는 2편에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류 감독은 “1편이 왜 성공했는지, 대중이 뭘 기대하는지 안다. 그걸 따라가는 건 게으른 선택이라고 봤다”고 했다. 이어 “영화로 솔직하게, 내놓고 묻고 싶었다. 관객을 믿었다. 1편을 본 관객은 9년 동안 성장했을 거고, 영화를 못 본 10~20대는 새롭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베테랑’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서도철 형사는 1편에서 주먹이 먼저 나갔지만, 2편에서는 행동보다 생각이 앞선다. 류 감독은 “서도철은 나쁜놈들한테 곧장 달려들던 형사였지만, 속편에선 ‘자신과 싸우는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다. 전편과 달리 악당과 부딪히기 전에 내면에서 충돌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서도철이 달라진 건 인간 류승완의 변화와 맞닿아있기도 하다. 예전에 류 감독 영화 주인공이었다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갔겠지만, 주먹이 무거워졌다. 이유를 물으니 류 감독은 “아이가 생기고 애들이 크면서 달라진 듯하다”고 답했다.
류 감독은 “서도철이 악당과 맞설 때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서 몇 가지 (선량한) 선택을 하는 데 그게 다른 액션 영화들과 차별되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서도철은 반성하고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이다. 이 시대에 사과하는 어른이 얼마나 귀한가. 또 서도철 부부가 존경스러운 건 각자 위치에서 제 일을 제대로 하고, 위태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점이다. 이 사회 진정한 정의란 이들 부부처럼 인간적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게 아닐까. 그 장면을 위해 달려간 영화”라고 말했다.
류 감독은 황정민 없이 ‘베테랑’도 없다고 했다. 속편 기획 배경에 대해 “황 선배(황정민)가 옆에서 ‘안 찍어?’ 물으며 계속 쪼았다”며 웃었다. 그는 “모로코에서 ‘모가디슈’를 찍고 돌아와서 ‘밀수’와 ‘베테랑’ 각본 작업을 거의 동시에 시작했고, ‘밀수’가 먼저 끝났다. ‘베테랑2’는 원래 여러 버전 이야기를 두고 의견을 나누며 만들어갔다. 이야기를 보여주면 황 선배는 ‘내가 너무 뛰어다니잖아’ ‘전편의 동어 반복 같다’는 의견을 주곤 했다”고 말했다.
제작비 없어 고구마 팔던 씨네키드…극장 지키는 영화감독으로영화 연출은 1996년 단편 ‘변질헤드’로 시작했다. 당시 류 감독은 제작비를 마련하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하철 보수 공사 현장에서 일하거나 동생인 배우 류승범과 길에서 고구마를 팔기도 했다. 그로부터 28년 만인 지난 5월 ‘베테랑’으로 생애 꿈꾸던 칸영화제 뤼미에르 극장 레드카펫에 올랐다. 상영 당시 그는 “여기까지 오는 데 50년이 걸렸다”고 벅찬 소감을 밝히기도. 그는 “그때 뤼미에르로 가는 차 안에서 ‘괜히 왔나’ 도망가고 싶었다”고 떠올렸다. 이어 “상영 끝나고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격려를 해줬다. 좋아하는 영화 ‘저수지의 개들’(1996) 제작자인 로렌스 벤더가 ‘재밌게 봤다’고 해줘서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로 극장가는 침체기를 겪었다. 이 시기 영화감독 대부분은 곳간이 두둑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눈을 돌려 거액을 투자받아 신작을 찍었지만, 류 감독과 그가 운영하는 제작사 외유내강은 달랐다. 이 시기 극장에 ‘모가디슈’와 ‘밀수’를 개봉해 흥행도 거뒀다. 유명한 영화 대사인 ‘우리가 돈이 없지(돈은 많겠지만), 가오가 없냐’는 말이 떠오르는 행보다.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좋다. 극장용 영화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사람들이 내 영화를 휴대전화로 보는 걸 상상하기 싫다. 극장 관람을 기준으로 화면, 사운드 등 영화를 만든다. 다만 시대가 변해서 저도 놓친 영화는 집에서 보는데, 휴대전화로는 안 보려고 한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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