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지금 삼성에 없는 것

조회 492024. 11. 15.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인간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인문학 만한 것이 없다며 손자인 이재용을 서울대 동양사학과에 보냈다. 장차 스스로 일군 그룹을 물려받을지도 모를 후계자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데 적합한 학문이라고 본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역사에서 무수히 반복된 흥망성쇠를 간접 경험해 경영자로서 통찰과 직관을 갖고, 그 속에서 사람을 부리는 방법을 배우기 바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창업 86주년(1938년 삼성상회 설립 기준). 이 창업회장과 아들 이건희 선대회장을 거쳐 3대에 이른 '이재용 시대'다. 삼성은 지금 안팎에서 여러 도전을 받고 있다. 이 선대회장의 사망과 지배구조 개편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를 거치면서 그룹의 중추인 삼성전자 주가는 연일 바닥을 치고 있다. 이제는 심리적인 마지노선인 주당 5만원대마저 붕괴됐다.

삼성전자는 올해 3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9조1000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약 3.7배 늘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 사이클이 범용 D램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변화한 데서 원인을 찾는다. 이제는 삼성전자가 점유율 1위인 D램마저 점차 수요가 줄고 있다. 그룹 계열사로 눈을 돌려보면 삼성전자를 제외한 금융계열사와 상사, 중공업 등 비금융계열사들이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 수년 전 신사업으로 삼은 바이오 부문이 있으나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삼성그룹을 이끄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청년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 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했지만,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8년 결혼 이후 부인과 함께 다시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 이 회장의 유학시절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이 회장은 숫자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 수시로 자신이 가진 계열사 주식의 시가를 확인했다. 현지에서 전화를 걸어 재무임원에게 주식의 현재가치와 자산현황을 일일이 보고 받을 정도였다.

당시는 그가 삼성전자를 떠나 있었을 때다. 지금도 이 회장은 주가와 민감한 실적 수치를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들에 따르면 그는 분기 또는 연간기준 매출과 영업이익 성과에 극도로 민감하다. 기업가치 제고가 주가부양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선대회장이 생전에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좋지 않아 '삼성 위기론'을 외쳤겠나.

삼성의 최근 상황과 관련해 강력한 오너십과 그룹 전반을 아우르는 로드맵 부재를 아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창업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사업을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한다)' 이념으로 가업을 일궜다. 1950년 전후의 혼돈기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제일제당을 설립해 국내 최초로 설탕을 생산했다. 이후 제일모직 공장과 비료 공장을 잇달아 세우고 1976년 컬러TV를 자체 개발했다. 미래의 국가 발전과 연계되는 건설 개발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윤을 좇는 기업가의 행보였지만 국가의 성장, 국민 삶의 질적 개선과 궤를 같이했다. 또 기업의 미래가 사람에게 있음을 알고 인적자원을 소중히 여겼다. 한식구가 된 조직 구성원과 꿈을 공유했다. 이렇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창업주의 바통을 물려받은 이 선대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신경영 시대를 열었다. 1995년에는 휴대폰 '애니콜' 초기 제품의 불량률이 11%를 넘기자 15만개의 휴대폰을 불태우기도 했다. 당시 이를 지켜보던 2000여명의 직원 중 일부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같은 극약처방 덕에 삼성은 글로벌 휴대폰 제조기업을 누르고 국내 휴대폰 시장 점유율 1위로 도약했다.

모든 것은 숫자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그룹 경영의 성과와 기업가치를 대변하는 주가는 실적으로 포장된 숫자에만 좌우되지 않음을 창업회장과 선대회장이 몸소 증명했다. 때로는 숫자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오늘을 사는 원동력이 된다. 그게 사람 사는 이치 아니겠는가.

길진홍산업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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