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자로 둔갑한 안익태, 친일 연주 영상과 행적

조회 3682024. 8. 20. 수정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말하는 김형석
만주국 10주년 기념 연주 지휘하는 安
일본 첩보조직 총책 집에서 기식하며 작곡
패망후 스페인으로 도망갔다 남한에 귀국
'축전곡'을 '코리아교향곡' 바꿔 이승만에 헌정

안익태의 1942년 만주국 10주년 기념연주회 영상

필자는 약 10년 전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의 자료실에서 찾아 낸 40초 가량의 연주회 클라이맥스 장면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영상은 INA이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쟁뉴스의 후반부에 실려 있던 것이다. 당시 전황이 추축국(연합국에 대항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불리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말미에 문화뉴스 꼭지에 실린 이 연주회 소식 말고도 그 날의 전쟁뉴스는 꽤나 긍정적인 톤이다.

이후 필자는 <안익태케이스>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사전 예약을 거쳐 베를린 소재 독일연방기록원(Bundesarchiv)산하 영상원(Filmarchiv)를 방문했다. 저 클라이막스 장면의 원 필름을 보기위해서다. 그 영상은 2000년대 잠시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파리에 머물 때였는데, 그 전날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영상원을 찾으니 직원이 필자가 신청한 필름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영상원은 과거 필자가 베를린에 살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미 연방기록원은 나치시절 기록물에 포함된 안익태, 즉 '에키타이안' 파일을 열람 복사하기 위해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영상원은 처음이었다. 혼자 앉아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직원의 동의하에 필자의 휴대폰으로 그 영상을 두 번 촬영했다. 몇 달 전에 예약하고, 또 파리에서 비행기로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때문인지 직원도 촬영 요청에 선뜻 동의해 주었다. 물론 대각선으로 검은 테이핑을 한 뒤에 말이다.

몇 년 전 필자는 광복회에 바로 이 필름원본 입수를 권고한 적이 있다. 비록 친일파의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역사 아닌가, 그렇다면 공법단체인 광복회라면 그 필름을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공개하는 이 필름은 그렇게 입수된 원본필름의 사본이다. 이 필름은 당시 국회토론회에서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축약본이 광복회 홈피에 올라간 적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이 영상은 전국민이 한 번은 보고 들어야할 우리 흑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대해 우리 모두는 반드시 알아야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안익태가 만든 ‘애국가’는 트로트처럼 ‘사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비록 법정 국가(國歌)는 아니지만 ‘공적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안익태의 행적을 추적한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외치고 나섰다. 필자로서는 국민들 스스로가 이런 일부 극소수 뉴라이트의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지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제공하고 판단해 보자는 쪽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에키타이안(안익태)의 2차 대전 시기 영상자료는 모두 3가지다. 먼저 프랑스 국립영상원자료가 있다. 두 번째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앞선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린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 기념 연주회 영상이다. 여기서 안익태는 일본을 대표해서 ‘에텐라쿠’를 연주했다. 해방후 안익태는 이를 ‘강천성악’이라 달리 부르며 청중을 우롱한 바 있다. 앞의 두 영상은 모두 내가 올려 놓은 지라 유튜브에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영상이 바로 여기에 소개한 영상이다. 약 7분 50초 정도인 이 영상의 마지막 40초를 편집해 나치의 전쟁뉴스 영상에 내보낸 것이다.

이 곡이 연주된 때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공습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시점에서 1년이 채 안된 시점이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동해, 조선과 일본은 전쟁상태였다. 일본의 놀라운 전과를 목격한 독일 전역은 당시 일본 붐이 불고 있었다.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일, 일본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 (Deusch-Japanische Gesellschaft)>가 독일 전역에, 그리고 <일독협회>가 일본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 바로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안(안익태)은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안이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일본귀족으로서 에키타이안과 같은 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 다음이 에키타이안이었다. <독일협회>는 나치선전성의 지휘감독을 받는 기관이었다. 즉 그 정점에 괴벨스가 있었다. 안익태를 추적하면서 여러 차례 서신교환을 한 바 있는 미 시카고대학교 음대의 티모시 잭슨 교수는 1942년 연주회 녹화가 괴벨스의 지시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점 독일외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반소 제2전선'을 열어주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독일 동부전선의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연주회는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 행사는 만주 일대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던 그런 각종의 기념행사중 하나였다. 즉 에키타이안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한 바로 그 적국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개최된 각종의 행사에 일본을 대표해서 이적행위에 솔선수범한 것이다.

에키타이안과 에하라 고이치

에키타이안이 하필 ‘만주국’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이유는 자신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당시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참사관이었지만 에하라 고이치는 동경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얼빈시 부시장을 역임한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하얼빈시 총무처장 그리고 부시장으로 재직할 때 731부대 창설에 핵심적으로 조력하고 이후 독일과 일본의 생화학전 무기 개발 프로그램에도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급상 참사관이지만 정식 공사인 한인 여의문보다 실세였다. 바로 그런 그의 사저에 에키타이안은 2년 반 가까이 주소지를 두고 여기서 기식했다. 베를린 호숫가에 있는 이 집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리고 미 CIA 전신인 OSS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 고이치는 전쟁말기 일본의 재독 첩보조직의 총책이었다, 쉽게 말해 재독 일본 스파이수장의 집에서 먹고 자고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셈이다.

에키타이안과 같은 시기, 에하라 고이치가 관리하던 베를린 체류의 또 다른 조선인이자 현대무용가 박영인(쿠니 마사미)을 OSS는 ‘가장 영리한 첩보원agent’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스파이총책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안은 어떤 평가를 했을까? 박영인은 전시에 독일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다녔다. 에키타이안은 전시에 추축국과 친추축국 그리고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그들을 위해 복무했다.

이 영상의 오프닝 크레딧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만주제국Mandschoutikuo 건국 10주년 기념 축하 연주회,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베를린 대편성 라디오방송교향악단이 라미LAMY 합창단 협연하에 작곡가 에키타이안이 지휘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합창대본을 쓴 ’축전곡Festmusik"이다. 그리고 배경에 깔린 총보의 제목도 ‘축전곡’으로 되어 있고 바로 그 밑에 에하라 고이치가 일본어로 쓴 ‘오족협화’를 찬양하는 합창대본이 음역되어 있다.

1942년 9월 18일의 이 영상은 이 축전곡의 마지막 악장이다. 영상의 5분30초 즈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하라 고이치로, 합창대본을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동양인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후 그는 중국에서 ‘한간’혐의로 총살되었다. 당시 주독 일본대사 육군중장 오시마 히로시는 영상 6분36초에 등장한다.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스럽다’는 평을 받던 인물이다. 6분40초 즈음에 에하라 고이치가 다시 잠깐 등장하고, 6분59초 너무나 익숙한 애국가의 ‘우리나라 만세’와 거의 같은 선율이 등장한다. 물론 이 때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만주국이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에키타이안이 청중석을 가리키는데 아마 에하라 고이치를 지목한 게 아닐까 싶다.

지휘하는 안익태

대한민국을 우롱한 에키타이안

이 영상은 전곡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1944년 말 이후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해지자, 사실상 추축국편이었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에키타이안의 '만주국'을 수차례 방송한 사실이 바르셀로나 라디오 방송국 편성표에 일자, 시간과 더불어 고스란히 나와있다. 그리고 이 방송이 '음반'을 통해 나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축전곡’의 전곡을 들어야 과연 에키타이안이 애국가 선율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꽤 장기간 이 음반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에서도 보듯 악보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에키타이안 본인이 이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안이 스페인 도피중 가지고 있던 이 곡의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移譜)한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 에키타이안이 만주국 악보를 '한국환상곡'으로 표지갈이한 바로셀로나 북쪽 휴양지 사가로라는 곳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훗날 에키타이안은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1955년 문득 애국자로 둔갑해 이승만 탄신기념연주를 위해 귀국한 에키타이안은, 이승만에게 이 악보를 헌정한다. 그 악보는 현재 김형석이 관장으로 있는 독립기념관에 있다!

1944년 전황은 추축국에게 가망이 없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에, 히틀러 생일주간에 열린 '연례 베토벤 페스티벌'에서의 연주를 위해 에키타이안은 에하라 고이치와 함께 파리를 방문했다. 이 연주회에서 저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토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협연했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 직후 파리가 해방된 뒤 ‘입국금지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되어 한참동안 프랑스에 올 수가 없었다.

에키타이안도 이 리스트에 올랐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연주를 끝으로 에키타이안은 프랑코 파시스트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망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해방이 되었는데, 왜 애국자가 그리운 조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일본인이지만 일본으로, 조선인이지만 조선으로도 가지 못한, 그렇다고 독일에 남을 수도, 미국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의 스페인행은 그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은폐하기에 나름 '잘 된(?)' 선택일지 모르겠다. 프랑코 독재가 싫어 파블로 카잘스(전설적인 첼리스트)는 살아 생전에 조국인 스페인에 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나치부역자가 나치  패망후 손쉽게 도망갈 곳중 하나가 스페인이었다.

누구의 명예회복인가

필자는 최근 해외 경매사이트에 에키타이안의 ‘흰백합화’SP판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곡은 특히나 에키타이안의 몇 안 되는 곡 중 작곡연도나 곡 내용이 불명인 상태로 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어디서 작곡되었는지는 이미 밝혀졌다. 에하라 고이치가 전후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귀국한 뒤 동경에서 자신의 후일담을 수필로 낸 것을 필자가 발굴한 적이 있다. 여기에 ‘축전곡’과 함께 ‘흰백합화’도 자신의 집에서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가격이 터무니 없어 나는 이 음반을 사지 않았다. 아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만주국 ‘축전곡’ 음반이 경매사이트에 등장하면 그것은 필자가 사겠다.

누가 에키타이안의 명예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 전에 이런 자의 애국가를 불러야 했던 우리 국민의 ‘명예회복’이 먼저다. 그래야 한다.


이해영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마부룩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이후 한신대학교 계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신대 부총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1세기한국정치학회 이사,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지냈고, 현재 (사)한국안보통상학회 회장, 시민단체인 <국가國歌만들기시민모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서양 정치사상과 국제 정치경제 전공자로서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의 사상을 강의하며, 국제통상, 한미 관계도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독문)를 썼다.
지은 책으로 『임정, 거절당한 정부』 『안익태 케이스』, 『낯선 식민지, 한미 FTA』,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 등이 있으며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 『1980년대 혁명의 시대』 등에 공저자 및 편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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