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는 늘 나를 봐주는 의사가 있다

하정은 2024. 10. 2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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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를 묻고 답하다] 문정주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 저자

의-정 갈등 속 의료 대란이 계속되고 있다. '의료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지만, 진정한 의료 개혁에 대한 논의보다는 윤석열 정부의 근거 없는 '2000명 증원'을 둘러싼 논쟁과 의료 위기가 부각되고 있다. 의료는 모두의 권리이자 복지다. 지역의료, 공공의료, 일차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의사들에게 앞으로 의료가 나아갈 방향을 물어본다. <기자말>

[하정은 기자]

 저자 문정주 선생님과 이탈리아 가정의들
ⓒ 문정주
지난 21일 이탈리아의 의료에 대해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의 문정주 저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문정주입니다. 저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경기도 연천군 보건의료원, 보건복지부 공공보건의료사업지원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일했습니다. 2020년에 이탈리아의 공공의료를 소개하는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를 출간했어요. 지금은 귀촌해 전라북도 임실에서 살면서 공공의료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직접 이탈리아에 가서 의료 제도 현장을 경험하고 책을 쓰셨는데, 여러 나라 중 이탈리아의 의료를 선택하신 이유가 뭔가요?

2005년부터 보건복지부 공공보건의료사업지원단에서 누구나 건강할 권리, 의료의 공공성 등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다 보니 이탈리아 의료 제도를 접하게 됐어요. 이주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어린이 환자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일 등, 의료계의 주류 쪽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지만 공공성이 뛰어난 분야에서 이탈리아 의료인의 노력이 활발한 걸 알게 된 거예요. 이탈리아는 '국영의료'를 시행하는 나라로, 의료제도에서 이미 건강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호하고 의료의 형평성을 높이려는 방향이 뚜렷하더군요. 그 뒤로 저는 이탈리아와 국영의료 양면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우리나라에 국영의료를 소개하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그때부터 했죠.

좌파와 우파가 함께 만든 국영 의료 제도
 이탈리아 국영 의료 안내서
ⓒ NHS
- 이탈리아의 의료제도는 국가가 의료를 책임지는 국영의료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의료와는 무엇이 다른가요?

이탈리아와 비교할 때 우리나라는 국가가 하는 의료보장에 매우 소극적인 나라예요. 국가 제도인데도 의료보장이 그야말로 보험, 다시 말해 돈을 맡아서 관리하고 필요할 때 내주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물론 사립 보험회사보다야 훨씬 낫지만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걸 믿고 그 권력을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국가가 해주는 의료 보장이 겨우 가격을 통제하고 진료 비용을 내주는 등 돈 관리에 머무른다는 건 국민의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너무나 소극적이지요.

- 그러면 이탈리아의 국영의료제도(이탈리아어로 Servizio Sanitario Nazionale, SSN. 영어로는 NHS)에서는 모든 의료서비스가 무료인가요?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나요?

모든 의료가 무료는 아니지만 중요한 의료는 무료예요. 구체적으로 볼까요? 우선 응급의료, 분만, 입원, 수술 등이 있죠. 종합병원에서 받을 수 있는 이러한 중요한 의료는 전부 다 무료예요.

다음으로, 아주 기본이 되고 중요한 '일차의료'가 무료예요. 일차의료는 흔히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1차 진료, 단순히 작은 의원에서 하는 진료와는 다른 개념이에요. 이탈리아를 비롯해 서구에서 일차의료(primary care)는 의사와 환자가 책임과 신뢰로 연결되는, 그야말로 기본이 되는 의료를 뜻해요. '내가 사는 동네에는 늘 나를 봐주는 의사가 있어, 나는 언제나 그분하고 상의해서 진료받고, 만약 더 복잡한 의료가 필요하면 그분이 또 길을 잡아주셔.' 이렇게 의사와 환자가 등록 관계를 맺고 의료를 이용하는 거죠. 이런 일차의료를 해주는 의사를 패밀리닥터, 가정의라고도 불러요.

이렇게 종합병원 의료와 일차의료가 있고, 그 중간에는 전문의 외래진료가 있어요. 무릎이 아파 정형외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든지, 심장이 약해져 심장내과 진료가 필요하다든지 하면 가정의가 환자를 전문의에게 의뢰를 해줘요. 전문의 외래진료는 무상이 아니라서 돈을 내야 합니다. 본인부담금은 36유로가 상한선으로, 그리 높지는 않아요. 만약 일차의료 의사의 의뢰를 받지 않고 자기가 따로 전문의에게 가게 되면 국영의료를 벗어난 것이어서 비싼 의료비를 내고요.

- 확연히 체계가 짜여 있는 의료네요. 역사적으로 우파와 좌파의 의료에 대한 극적 대타협이 있었기에 그러한 의료체계가 만들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이탈리아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봉건적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이 어마어마하게 뒤집어 엎었습니다. 68혁명 이전에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우파가 독재에 가까운 권력이었지만, 68혁명 이후 좌파, 공산당의 세력이 커져 1976년 총선을 치렀을 때 우파는 좌파보다 겨우 약간의 의석을 더 가진 정도였어요. 유럽은 의회주의다 보니 집권을 위해 좌파 공산당과 우파 기민당이 연합체제를 만들게 됐어요. 3~4년의 그 짧은 좌우연합 기간 중간인 1978년에 국영의료제도가 양쪽의 합의로 성사되었습니다.

- 이탈리아에서 환자가 의원이나 병원에 갈 때 한국과 무엇이 다른가요?

제가 이탈리아 일차의료 의사 진료실에서 관찰해 보니 환자가 의사에게 와서 한참 대화를 나눈 뒤에야 처방전을 받아 가요. 우리나라에서 정말 결핍된 게 의사의 충분한 설명, 깊이 있는 상담인데 이탈리아에서는 일차의료를 통해 그게 충족되는 거죠. 정말 부러웠어요.

이탈리아에 사는 우리나라 교민에게 들은 얘기를 할게요. 교민들이 한국에 오면 의료 이용을 많이 하셔요. 한국에서는 빨리 검사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 교민이 모처럼 한국에 와서 유방초음파, MRI 등 검사를 하는데 예약도 금방 되고, 검사도 며칠 안에 받아서 너무 좋았대요. 그랬는데 결과를 보러 가서는 크게 실망한 거예요. 의사의 결과 설명이 그냥 "다 괜찮아요. 별거 없어요." 그러고 끝났다는 거예요. 이탈리아에서 그런 건 상상할 수 없어요. 의사들이 굉장히 자세하게 검토하고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죠. 그 교민이 말했어요, 한국 의료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고요.

- 의료도 입원이나 그런 것들 다 무료고, 돈을 더 낸다고 더 좋은 의료를 받고 그런 형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의료네요.

그렇죠. 그러나 어디서나 돈의 위력은 있어요. 돈 많은 사람들이 큰돈을 내면 우선적으로 빨리 진료받는 식이지요. 이탈리아 국영의료는 국가가 국민 모두를 책임지는, 기본적으로 무상 의료다 보니 차례대로 진료받는 관리 체계가 있습니다. 질병의 시급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달리해 급한 환자부터 먼저 수술해요. 예를 들어 응급이 아닌 자궁 근종 수술은 예약에서 수술까지 6개월 걸리기도 하죠.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기 나라 의료는 '너무 기다린다'고 욕도 해요.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그 의료제도에 대해 굉장히 자부심이 있어요.

- 이탈리아에서는 디지털 의료가 발달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이탈리아의 20개 주별로 다르지만, 대체로 북부에서는 디지털 의료하고 비대면 진료가 활발해요. 제가 갔던 곳은 북부에 있는 에밀리아로마냐주인데요, 이 주는 의료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디지털 의료에서도 앞서 있어요. 누구나 핸드폰으로 자신의 의료정보를 다 볼 수 있는 거죠.

비대면 진료의 원칙은 '아는 환자에게만 해야 한다'예요. 일차의료 제도가 뿌리 내린 이탈리아 같은 곳에서는 의사와 환자가 등록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디지털 기술을 의료에 활용할 수 있죠. 일차의료 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의료의 디지털 정보화를 가로막고 있어요. 모르는 환자를 비대면으로 진료하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요. 만약에 어떤 의사가 환자의 질병 상태에 관해 이미 알고 있고 검사 결과도 다 알고 여러 번 진료했고 그러한 경우에는 비대면 진료가 얼마든지 가능하죠.

'작은 정부, 큰 시장' 정책 여파로 코로나 급속 환산
 코로나19 피해가 극심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교민 309명을 태운 전세기가 2020년 4월 1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한 교민들이 강원도 평창 숙소행 버스를 타고 있다.
ⓒ 권우성
- 2020년 코로나19 상황에서 이탈리아에서 많은 사망자가 나왔는데 이는 이탈리아 의료와 관계가 있나요?

코로나19 초기에 북부 롬바르디아주에서 환자도 많고 사망자도 많았었죠. 부유한 북부에서, 그중에서도 최고로 잘 살고 의료 수준도 뛰어난, 롬바르디아 주에서 그 사태가 터졌으니 정말 아이러니했죠. 원인은 바로 그 주 집권당이 추구했던 "작은 정부, 큰 시장"이에요. 이곳에서는 극우 정당이 1995년부터 장기 집권을 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주 정부에 허락된 최대한 자율권을 악용해 30년 동안 공공의료, 일차의료를 약화하고 사립병원을 키웠습니다. 그 사립병원이 뭐를 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굉장히 낯익은 일을 해요. 심장 시술, 관절 수술, 척추 수술, 암 수술 등 돈 되는 의료죠. 대신에 중요하지만 돈 안 되는 거, 대표적으로 응급의료와 중환자 진료를 최소화했어요.

2020년 2월에 롬바르디아주의 주도인 밀라노 근처 농촌 지역에서 코로나가 터졌는데 일차의료가 약화되어 있던 게 큰 약점이었어요. 게다가 롬바르디아주의 '작은 정부' 체제 안에서 자체 감염병 감시망 이런 것이 거의 없어서, '이게 코로나구나'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사망 환자가 나오고 있었어요.

응급의료 약하지, 중환자실도 약하지, 감시망도 안 돼 있지 하니까 거의 속수무책으로 코로나가 퍼지고 사망 환자가 계속 났어요. 주 정부가 의료정책을 관리하고 평가하는 체계를 굉장히 약화시킨 것, 특히 일차의료 등 공공성을 지키는 제도를 무너뜨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한 데 따르는 결과였어요.
▲ 이탈리아 응급의료시설 병상에 누워있는 코로나19 환자들 2020년 3월 12일(현지 시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는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의 한 병원에 세워진 응급의료시설에서 코로나19 환자들이 병상에 누워 있다.
ⓒ 연합뉴스/AP
- 이탈리아의 사례로 공적 의료제도가 약해지면 어떤 상황이 되는지 볼 수 있네요. 앞으로 우리나라의 의료가 가야 할 방향을 들을 수 있을까요?

국민건강보험이 그동안 우리나라 의료를 지탱해 왔지요. 동시에 우리 건강보험제도는 국가적 무책임을 보여줍니다. 매우 소극적인 미완성 제도라는 점에서요. 국가는 국민이 낸 보험료 재정만 관리하고 있어요. 공공의료 인력을 키우지 않고, 지역 공공병원을 세우는 일에 나 몰라라 하고, 일차의료 제도를 만들지도 않고 말이죠. 이렇게는 고령화 사회에서 의료를 감당할 수 없어요. 국가가 국민의 삶, 어쩌면 국가의 생존이 걸려 있는 이 의료에서 국가의 책임을 지금까지와 달리 직시해야 해요. 국방, 치안, 외교 그런 것에 거의 필적하는 거죠. 정부가 절대로 그냥 알아서 하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건 일이 크고 복잡하거든요. 시민의 요구가 커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일차의료 제도화예요. 일차의료는 환자 대부분에게 많은 것을 충족해 줘요. 일부 전문적인 문제에서만 전문의 진료를 받게, 꼭 필요한 사람만 큰 병원에 가게 하고요. 사실 이와 같은 일차의료 제도가 있어야 큰 병원이 경증 외래진료에 시달리지 않고 중증 고도 진료에 전문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가 지방자치가 약한데 그래도 의료, 특히 일차의료 제도화에서는 지방정부가 큰 역할을 해야 해요. 그래서 의료의 공공성 강화가 지방정부의 역할을 키우는 것과 병행할 거라고 생각해요.

- 말씀 감사합니다. 이제는 국가가 의료의 책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 깊게 남네요.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의료는 정치적 이슈가 아닌 모두의 권리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으면 합니다.
 문정주 저자
ⓒ 문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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