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9월 1일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여권통문의 날'입니다.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주축이 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요? 교제 폭력으로 여성이 죽고, 불법촬영이나 리벤지 포르노만으로 기가 막혔던 성범죄는 이제 딥페이크로 상상할 수 없던 선을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당차게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 시대 지역 곳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조명합니다. <편집자말>
[월간 옥이네]
▲ 충북 옥천 안남면 종배리 한글교실 5명의 학생들. |
ⓒ 월간 옥이네 |
여름방학이 너무 길었어요
한글학교를 찾은 8월 21일은 2주간의 여름방학을 뒤로한 개학일. 일찍부터 마을회관에 나와 책상에 앉아있는 다섯 명의 학생 모두 한껏 상기된 표정이다. 이들이 기다리는 이는 다름 아닌 한글학교의 유일한 교사 박미선(61)씨. 그가 곧 양손 가득 빵을 사 들고 교실로 들어선다.
"어머님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시고?"
반가운 목소리에 더욱 왁자지껄해지는 교실이다. "아이고, 선생님이 간식을 사 들고 오시면 어떡햐." "가만 있어 봐. 자두를 좀 꺼내야지." "좀 먹고 시작하지요." 곧 교실 한가운데 푸짐한 간식 상이 펼쳐진다. 둘러앉아 간식을 먹는 이들의 대화 주제는 날씨와 농사. 또 방학 기간 중 새롭게 바뀐 교실의 풍경이다.
"글쎄, 회장님이 칠판이랑 선생님 단상 새로 갖다 두셨잖아요."
교실의 청일점인 이종석 노인회장이 더 나은 교실 환경을 위해 칠판을 새로 구매하고, 선생님이 올라서 칠판 판서를 할 수 있도록 단상을 만들어 온 것.
"선생님 판서할 때 위쪽은 손이 닿지 않으시더라구. 내가 방학 때 간단하게 단상을 만들어봤어요. 칠판이랑 보드마카, 지우개도 다 새것이에요. 이제 아주 말끔하게 닦일걸?"
교실을 둘러보며 깜짝 놀라는 박미선씨다. "어머나, 정말이네요. 나 눈물이 날 것 같네." 그의 말에 모두 또 한 번 웃는다.
▲ 충북 옥천 안남면 종배리 한글교실 수업 현장. |
ⓒ 월간 옥이네 |
선생님의 낭독에 맞춰 학생들이 받아쓰기를 하는 것으로 수업은 시작됐다. 예쁘게 깎은 연필로 또박또박 받아쓰기하는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그중엔 오른손을 다쳐 붕대를 감은 학생도 있는데, '문제 없다'며 연필을 쥐고 받아쓰기를 한다.
커다란 달력 뒷면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써가며 지난 2주일간 연습한 문장들이다. 헷갈리는 맞춤법이 많지만, 열심히 연습한 덕분에 자신 있게 받아쓰기를 하는 모습이다.
"이제 다들 받아쓰기를 곧잘 하세요. 매번 어려워하실 만한 문장 찾는 게 쉽지 않죠(웃음)."
교과서는 '3·4학년이 꼭 읽어야 할 교과서 동화'. 1·2학년 대상 교재는 이미 마무리하고 이번이 두 번째 교과서란다. 매주 하나의 동화를 함께 소리 내어 읽으며 읽기 연습을 하는데, 오늘의 동화는 <닮아가기(정향숙 저)>이다.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엄마를 둔 '수진이'가 자신을 돌보기보다 봉사에 집중한 엄마를 미워하다가, 엄마를 닮아가고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
한 사람씩 돌아가며 동화를 읽고, 다음 수업 때 받아쓰기할 문장에도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다. 학생들이 노트에 문장을 받아적는 시간에 선생님은 칠판 한쪽에 함께 읽을 시를 적어넣는다.
▲ 충북 옥천 안남면 종배리 한글교실 수업 현장. |
ⓒ 월간 옥이네 |
삶에 큰 부분으로 자리 잡은 이 수업은 사실 사라질 위기에 있었다고. 처음 시작은 2023년 5월 안남면 지수리 보건진료소 석은숙 소장의 봉사에서부터였다. 매주 동네를 돌아보며 진료하던 석은숙 소장이 주민들의 요청으로 한글 수업을 진행했던 것. 그는 건강 검진과 함께 옥천성당에서 책과 공책을 지원받으며 한글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석은숙 소장의 발령으로 종미리 한글학교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곳에 희망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종미리 전월식 이장의 아내인 박미선씨.
"마을에 돌아온 건 작년이에요. 옥천에서 가게를 오래 하다가 마을에 다시 온 건데, 남편이 저더러 마을회관에 좀 가보라 했죠. 어머님들이 '한글학교 없어지는 것이 너무 아쉽다'고, '선생님 구하는데 사모님 좀 보내달라' 한다고..."
누군가를 가르쳐본 경험도, 이렇다 할 지식도 없던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부탁이었다. '죄송하지만 어렵겠다'고 말씀드리려 간 마을회관에서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어르신들의 간절한 눈빛이었다.
"어머님들 눈을 보는데 거절을 못하겠더라고요. 20년 전에 마을에 왔을 때는 '언니'였던 어머님들이 어느새 '엄마'가 되신 거예요. 한글을 더듬더듬 쓰고 읽던 우리 엄마 생각이 확 났어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것도 잠시, 그는 이전 교사였던 석은숙 소장에게 수업방식을 배우고 교재를 연구하는 등 수업을 준비했다. 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딸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자투리 시간에 시를 읽는 것은 우리 딸이 추천해준 거예요. 마침 선물받은 시집이 있어 활용해보면 좋겠다 싶었죠(웃음)."
부담스러웠던 자리지만, 이제 박미선씨에게도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서의 시간이 일상에 큰 활력소가 됐다. "글을 가르친다기보다 '엄마'들에게 인생을 배우는 것 같다"는 박미선씨다.
지난 7월에는 옥천성당에서 입식 책상과 의자를 지원해줘 학습 환경이 한결 편안해지기도 했다. 이전에는 접이식 좌식책상을 펴놓고 바닥에 앉아 수업을 들었는데, 이제는 편안한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된 것. 덕분에 더욱 '교실다운 교실' 풍경이 됐다.
"옥천성당에서 교재와 학용품, 책상과 의자 등 수업에 필요한 물품들을 종종 지원해주고 계세요. 아니었더라면 어려웠을 텐데 너무 감사한 마음이죠."
▲ 충북 옥천 안남면 종배리 한글교실 수업 현장. |
ⓒ 월간 옥이네 |
"잠 안 오면 종이 꺼내놓고 계속 받아쓰기 연습을 해요. 이제 웬만한 것은 다 쓸 줄 알지. 내가 또 자랑 하나 할게요. 얼마 전에 보건소에서 치매 검사를 했는데 100점을 맞았어! 한글학교 덕분이야." (김정희씨)
"안내면 오덕리에서 나서 어릴 적에 능월초등학교(청성면 도장리, 1945년 개교, 2009년 폐교) 잠깐 다니고 그만뒀어요. 집에 있으면 심심하고 무료했을 텐데, 여럿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같이 공부하니 너무 좋지요." (전금순씨)
"나는 남 탓 할 수도 없는 게, 스스로 학교를 그만뒀어요. 1학년 다니고 월반을 해서 3학년 반으로 갔는데, 못 따라가겠는 거야. 기초가 없으니 뒤떨어지고 재미가 없었죠. 차근차근 배웠어야 하는데... 그러다 뒤늦게 배움에 즐거움을 느끼는 거예요. 선생님만 계시면 국어 말고 수학도 배우고 싶지요." (손길자씨)
"5남매 중에 나만 여자였거든요. 어머니가 나 일곱 살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가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를 안 보냈어요. 나머지 남자 형제들은 고등학교까지 다 학교를 갔거든. 그게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도 원망을 했어요. 지금 이렇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몰라요." (이종례씨)
"처음에는 한글학교에 아홉 명이 있었는데, 연세 드셔서 병원에 가시고 하면서 다섯 명이 되었죠. 수는 적어도 다섯 사람 모두 우등생이고, 다들 열심히 수업에 참여해요. 한글학교 생긴 이후로 우리 마을회관에 사람도 더 많이 모이고, 분위기도 활성화되고 좋아졌어요. 이곳을 돌보는 것은 노인회장으로서 나의 책무이기도 하죠." (이종석 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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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옥이네 2020년 12월 호(통권 제 42권) 안남어머니학교 특집
월간옥이네 통권 87호(2024년 9월호)
글 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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