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50? 팜 투 테이블? '한글 파괴'하는 공공기관들

윤성효 2024. 10. 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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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행사, 사업, 제도 이름 외래어 남용... 일부 기관에선 '사업명 바로 쓰기' 운동 도

[윤성효 기자]

 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지역본부 마당에 설치된 '창원국가산업단지 지정 50년 기념 조형물'.
ⓒ 윤성효
'Beyond 50, 브레이크 더 몰드, 스펀지파크, 스펀지데이, 아이디어톤, 곰매직 빅벌룬쇼, 리버나이트, 피크닉, 로컬콘텐츠, 실크로드, 리치리치페스티벌, 워킹데이...'

경남 지역 행정을 비롯한 공공기관들이 붙인 행사·사업 이름이거나 구호 내지 장소, 설명들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제대로 알아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 정도라면 공공기관이 '한글 파괴 주범'이라고 평가할만 하다. 쉬운 한글이 있는데도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외래어를 끌어다 해 놓은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한글날을 맞아 몇몇 사례를 정리해봤다.

"'Beyond 50'이 아니라 '도약 50' 내지 '새로운 미래 50'으로"

창원에 있는 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본부 입구에 지난 4월, 창원국가산업단지 지정 50주년을 기념해 상징 조형물이 세워졌다. 이곳은 주조형물과 기념 휘호석, 기억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8m 높이 주조형물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주재료로 해 제작됐다. 작품명은 'Beyond 50'이고, 실제 글자 그대로 표시가 돼 있다.

창원시는 "다양한 기업, 노동자가 모여 만들어 온 창원국가산단을 과거 50년의 성장동력과 우수한 기술력이 융합해 새로운 미래 50년의 도약을 이룬다는 의미를 형상화했다"라고 설명했다.

영어 'Beyond'는 우리 말로 하면 '넘어서' 내지 '이상으로' '뛰어넘는'이라는 뜻이다. 조형물을 본 한 노동자는 "창원대로를 지나면 보이는 조형물이라 저 글자가 무슨 뜻인가 싶어 검색을 해보고서야 의미를 알게 됐다"라며 "누구나 쉬운 우리말로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도약 50' 내지 '새로운 미래 50'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또 창원시는 지난 8월 용호동 가로수길에 있는 청년문화예술복합공간에서 청년예술인들이 참여한 볼거리, 즐길거리의 행사를 열었다. 창원시는 관련 보도자료를 내면서 행사가 열리는 장소를 '스펀지파크'라고, 행사 이름을 '스펀지 데이'라 했다. 구호는 '브레이크 더 몰드'라고 표현했다.

굳이 장소를 '스펀지 파크', 행사명을 '스펀지 데이'로 해야 하나 싶은데, 구호를 소개하면서 영문(BREAK THE MOLD)부터 작은 제목으로 먼저 써놨다. 본문에도 '브레이크 더 몰드'가 앞에 있고 '기존의 틀을 깨다'는 뒤에 있다. 영문 없이 '기존의 틀을 깨다'만 표현해도 뜻이 통하는 데 문제가 없다.

이에 대해 창원시 관계자는 "청년 문화예술인들이 입주해 있는 공간에서 벌이는 행사였고, 청년들이 기획했다"라며 "기획자의 의도에 맞게 했던 것이고, 시에서는 보조 역할을 했다"라고 설명했다.
 창원특례시 가로수길 스펀지파크, 31일 두 번째 ‘스펀지 데이’ 개최.
ⓒ 창원시청
 창원시청 보도자료.
ⓒ 창원시청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가장 많이 쓰는 외래어 가운데 하나가 '마스터 플랜'이다. 경남도청이 지난 8월 낸 보도자료에는 '도시정책 마스터플랜 중간보고회'라고 돼 있다. '마스터플랜'을 '종합계획'으로 하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경남도는 '지역을 구할 아이디어 전력질주'라는 행사를 열면서 '로컬미래' '아이디어톤(아이디어+마라톤)' 등의 표현을 썼다. '로컬'은 '지역'이라고 쓰면 될 일이다.

김해시는 지난 5월 김해가야테마파크 가야왕궁에서 국제신혼부부의 전통혼례식을 전하는 보도자료를 내면서 '결혼'을 '웨딩', '상차림'을 '케이터링'이라고 표기했다. '케이터링'이 앞이고 '상차림'은 괄호 안에 넣어놨다.

의령군은 축제를 열면서 '리치리치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진주시는 비단(실크)융복합전문단지 쪽 길을 명예도로명으로 '진주실크로드'라고 불렀다. 이 이름도 '부자축제', '진주비단길'이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함양군은 지난 6월 '문화가 있는 날' 행사를 열면서 붙인 이름이 '곰매직 빅벌룬쇼'다. 마술사와 함께, 어린이를 비롯한 관객들이 풍선으로 아주 큰 강아지를 만들며 즐기는 행사다. '마술사와 함께하는 대형 풍선 공연'이라고 표현하면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이름을 정할 때 한글 위주로 해야"
 창원마산 내서초등학교 앞에 내걸린 펼침막.
ⓒ 윤성효
한글 파괴는 교육기관도 자행하고 있다. 창원마산 내서초등학교 앞에는 '우리 학교 워킹데이'라고 적힌 펼침막이 오랫동안 걸려 있다. 펼침막에는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면 될 표현을 영문(Good Morning)으로 표기했다.

'워킹'이라는 단어가 '일'의 영문인 '워크(work)'로도 오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날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날이 아니라 일하는, 일종의 체험학습 하는 날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에 물어보니 여기서의 '워킹'은 '걷기'였다. 그렇다면 '우리 학교 걷는 날'이라고 하면 된다.

이 학교 관계자는 "마산보건소에서 아침마다 걷고 있는 활동을 시작하면서 내건 현수막이고, 매주 화·목요일에 하고 있다"라며 "보건소에서 제작해 준 현수막을 그대로 걸었다. 앞으로 자체 행사를 할 때는 우리말을 사용하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공공기관에서 한글, 우리말을 파괴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책 <요즘 우리말께서는 안녕하신가요>를 펴낸 이우기 경상국립대 홍보실장은 "저도 우리 말을 파괴한 사례들을 모아봤는데, 수없이 많아 정리하기가 힘들 정도였다"라며 "행사든, 사업이든, 제도든 처음 이름을 붙일 때 우리말을 정해 놓으면 비슷하게 파생돼 계속 하게 된다. 처음 이름을 정할 때 한글 위주로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어기본법에서는 행정기관이 한글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한글날에 기념식을 할 게 아니라 평소에 한글 위주로 쓰도록 해야 한다. 쉬운 우리말로 이름을 정하거나 설명을 하면 이해하기도 쉽고 의미도 잘 전달이 될 것이다."
 진주 실크로드.
ⓒ 진주시청
"우리말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되새긴다"

이런 가운데 한글 쓰기를 해야 한다고 나선 공공기관도 있다. 경남도교육청이 "우리말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되새긴다"며 '한글 아이좋아 포스터 공모전'을 벌였고, 창원시가 모든 부서를 대상으로 '행사명 바로 쓰기 우수부서'를 선정하기로 했다.

경남도교육청은 지난 5월 "학생에게 한글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되새기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라며 처음으로 '한글 아이좋아 포스터 공모전'을 열었다.

경남교육청 관계자는 "일상에서 외국어나 외래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요즘이다. 한글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공모전을 열어 호응을 얻었다"라고 평가했다.

창원시는 지난 5월 보도자료를 통해 "행사명과 표어 등에 외국어·외래어 사용을 지양하고 알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기 위해 '행사명 바로 쓰기 우수부서'를 선정한다"라고 알렸다.

'GSAT 2024 스타트업 컨버전스 리그', '수소모빌리티 로드쇼', '스마트 피쉬 팜'처럼, 외래어가 혼용된 행사(사업)명은 어렵고 부정확해 시민들에게 혼란을 준다고 본 것이다. 가령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가 아니라 '농산물 이력 추적·관리제'로 하자는 것이다.

창원시는 마감 결과 22개 부서에서 38건을 신청했다. 창원시는 오는 14일 국어진흥위원회 심사를 거쳐 시상할 예정이다. 또 창원시는 '어려운 행정용어 발굴·바꾸기' 제안을 받았는데, 415건이나 신청해 심사를 거쳐 시상한다. 가령 '절취선'을 '자르는 선'으로 바꾸자는 것.

최정규 공보관은 "외국어, 전문용어, 축약어로 된 정책이나 사업명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민의 목소리에 크게 공감해 이번 행사를 기획하게 됐다"며 "11월에는 각 구청별로 직원을 대상으로 한글 바로 쓰기 교육을 할 것"이라고 했다.
 경남도 '아이디어톤' 행사.
ⓒ 경남도청
 함양군 6월 문화가 있는 날 곰매직 빅벌룬쇼
ⓒ 함양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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