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39년간 한글로만 붓글씨, 왜 그랬냐면

김슬옹 2024. 10. 1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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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578돌 한글날에 한글유공자상 받은 한글 서예가 권명원 씨

[김슬옹 기자]

▲ 한글학회를 방문해 김한빛나리 사무국장으로부터 사전 원고함 설명을 들으며 기뻐하는 권명원 씨 한글학회를 방문해 김한빛나리 사무국장으로부터 사전 원고함 설명을 들으며 기뻐하는 권명원 씨(왼쪽) @김슬옹
ⓒ 김슬옹
올해 한글날에 한글유공자상을 받은 워싱턴 한글학교 협의회 부이사장인 권명원씨가 12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한글학회를 방문했다.

문체부는 공개한 공적서에서 그에 대해 "한글서예가로 1980년부터 작품활동 중 1985년 이민하여 39년간 개인전·그룹전 및 현지 행사 다수 참여, 대형 붓글씨 시범 및 한글 창제원리 소개, 미국 연방의원, 정치인, 예술계, 학계, 일반인 등 수만 명에게 한글로 이름을 써주는 등으로 한글에 대한 현지 관심 제고 및 한글서예와 한글의 세계화에 기여한 공로"라고 소개했다.

미국에서 이렇게 오랜 세월 한글붓글씨로 한글과 한국문화를 빛낸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서의 그의 공적이 더 의미가 있다.

한글에 진 빚 갚는 것뿐

- 이번에 한글을 빛낸 큰 상을 받으셨거든요. 수상 소감을 좀 말씀해 주세요.

"너무 쑥스러워서 말씀드리기가 힘들어요. 한글로 서예를 하다 보니까 늘 한글에 빚지고 산다 생각했어요. 빚쟁이한테 이렇게 큰 상을 이렇게 주신다는 게 너무 과분한 영광이었고요. 내가 빚을 진 만큼 돌아가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 더욱 큰 활약이 기대됩니다. 공적서에 보니 미국 가시기 전부터 계속 붓글씨를 쓰셨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에서부터 썼고요, 진짜 작가로 활동하게 된 건 80년도쯤 개인전을 시작으로 했습니다."

- 그럼 한국에서 붓글씨는 누구한테 배우신 거죠?

"저는 초등학교 때만 배우고 나머지는 독학이었습니다. 나중에 한국개발연구원을 다녔는데, 5시에 퇴근하고 새벽 1시나 2시까지 하곤 했으니, 그때부터 붓글씨에 미쳐 있었죠."

- 한글 붓글씨를 좋아하는 이유 또는 매력이 있다면요?

"매력에 빠졌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칭찬에 속았던 걸까요? 제가 강원도 원주 출신인데 시골 어르신들이 글씨 잘 쓴다고 동네 간판 쓰라고 그러셨어요. 또 고등학교 때엔 졸업장에 이름 쓰고 하는 건 제가 다 한다고 나서기도 했죠. (웃음) 군대에 있는 3년 동안에도 계속 점호 끝나고 나면 사무실에 들어가서 글씨 쓰고 그랬습니다. 항상 그렇게 글씨를 쓰고 싶었어요. 땅바닥에 앉으면 손가락으로 바닥에다가 쓰고, 바위에 앉으면 물 찍어서 쓰고 그랬어요."

- 진짜 글씨 쓰기를 좋아하셨군요.

"네, 쓰는 것 자체를 좋아했어요. 쓰면서도 낙서를 한 게 아니라 그야말로 글씨에 골격을 갖추고, 규칙을 적용하고, 모양을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미국에서 본 붓글씨는 전부 한자

- 이민은 1985년에 가셨다고 했는데 그때 한글 붓글씨에 대한 미국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때는 여행 자유화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적인 작품이나 한국 문화가 많이 퍼져 있지 않은 상태였지요. 더욱이 붓글씨는 거의 다 한자, 한문이었어요.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차이가 없는 것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사명감에 불타 더 한글 붓글씨에 빠져든 것이죠."
 권명원씨가 외국인들에게 한글로 써 준 이름 @권명원
ⓒ 권명원
- 사실 요즘 한국에서도 한글 붓글씨보다 한자 붓글씨가 더 많다고 하니 안타까워요. 그러면 미국에서 활동하신 것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국 가자마자 3일 만에 워싱턴 도착해서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 박물관, 말하자면 국립박물관 같은 곳에서의 일이 기억 납니다. 거기는 다 무료예요. 그런데 그 박물관에 갔을 때 한국관, 중국관, 일본관이 모두 같이 연결돼 있었어요. 근데 한국 작품하고 중국 작품의 내용이 같더라고요. 다 한자 서예로 돼 있고요, 불상도 한국과 중국 모두에 적용되는 것들, 동양화 작품들도 전부 한자로 돼 있다 보니 구분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 학예사와 면담하며 이 내용들에 대한 시정 조치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는 얘기가 이미 대사관 측에서 한국 정부에 한 5년 동안 계속 얘기를 해왔대요. 한글 작품 좀 보내달라고, 박물관 내용 시정하겠다고 몇 번 요구를 했다죠. 그래서 제가 직접 대사관에 전화를 해봤는데 똑같은 얘기예요.

그러면 제가 글씨를 쓰는 사람인데 협조를 하고 싶다 해서 몇 개를 보여줬더니 한 6개월 만에 대답이 왔어요. 한번 해보자고. 그래서 '훈민정음 서문' 그리고 '가시리' 두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죠. 그때서부터 한국인들이 오면 그게 한글이니까 금방 알아보잖아요. 한국관이라는 게 구분이 딱 되는 거예요. 한글이 반가운 거죠.

그런 일들이 가장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인해서 2003년도부터 2011년까지 해마다 행사를 같이 해왔고, 전통문화축제 같은 곳에서는 한국을 대표해서 45m 대형 붓글씨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죠."

- 재미있는 사건도 많았겠어요.

"급박한 상황에서 멋진 행사를 치룬 경험도 있지요. 텍사스에 있는 샌안토니오 시 컨벤션 센터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world language expo 그러니까 세계 문자 박람회죠. 세계 5000여 명의 학자들이 모였었어요. 국제교류재단에서 함께 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한국 학자 70명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준비한 한글의 창제 원리 자료를 나눠주고 학자들한테 소개하도록 하고, 저는 옆에서 한글로 이름 써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인기가 최고였어요. 뭐 중국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었는데도 인기는 한국이 최고였죠."

한자 붓글씨는 한번도 쓰지 않아

- 국제대회에서 한글을 아주 제대로 빛내셨네요.

"학자분들이 뭘 몰라서 못 하는게 아니라 뭘 해야 할지를 몰랐던 거죠. 그래서 그 요령, 다음에 이런 것들을 하게 되면 저런 내용들을 준비하시면 아주 좋다, 말해주었죠. 제가 어느 행사장에 가든지 늘 해오던 일들이니까 금방 내놓을 수 있던 것 같습니다."

- 다 준비가 되어 있었군요. 그럼 가장 보람 있는 붓글씨 행사나 전시는 무엇이었는지요?

"코스타리카에서 약 1700명에게 이름을 써준 것입니다. 반응은 정말 엄청났죠. 대단해요. 그 당시만 해도 싸이가 딱 해외에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거든요. 그런데 코스타리카는 그 전부터도 한국에 대해 되게 관심이 많았어요.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선생님 나 한국 가고 싶어요!' 할 정도예요. 제가 여러 번 초청 받아서 갔었는데, 그중에서 몇 번은 한글을 주제로 해서 자기들끼리 발표를 하더라고요.

각자 한국에 대해 조사를 하는데, 누구는 한국의 건축, 누구는 한복, 또는 음악, 이렇게 각각 나눠서 주제 발표를 하는데 한국말로 해요. 정말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런 사람들이 제가 써준 한글 이름을 받으면 더 반응이 좋은 거죠. 코스타리카 대통령과 장관, 문화예술인들 모두 다 모인 자리에서 거의 1700명의 이름을 다 써주고 왔습니다. 거기서 퍼포먼스랑 특강도 여러 번 했고요. 국립박물관에서 개인전을 했는데 용비어천가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더라고요. 해당 관련 작품은 제법 큰데, 그곳에 기증을 하고 왔죠.

제가 미국에서 주로 하고 싶었던 거는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문화센터든 간에 한글이 들어가게끔 전시하는 것이었어요. 공공기관에 가보면 정말 한자 서예만 잔뜩 걸려 있거든요. 우리나라 작품의 90퍼센트가 한자로 되어 있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특히 제가 미국에 가서 한글만 쓰게 된 동기가 그겁니다.

제가 해외에서 한자를 쓰면 중국 사람들 도와주는 것밖에 안 돼요. 들러리밖에 안 되는 거죠. 지금 몇 년째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설날 축제를 하는데 그때마다 저도 부르고 중국 사람도 부르고 그래요. 둘이서 공동으로 뭔가를 하게 돼요.

처음 제안은 한자로 같이 써주지 않겠느냐 하지만, 저는 당당하게 내가 이번에 한글로 쓴 것을 당신이 한자로 쓰고, 또는 번갈아 가면서 한자와 한글을 쓰자. 아니면 서로 한글 있는 데에는 한자로 조그맣게 쓰고, 한자 있는 데에는 한글로 조그맣게 써서 누구나 다 알아보게끔 유도해서 다 같이 공유하자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놨어요.

그러니까 저는 미국에 가서 한자를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지켜온 거죠. 그래서 제 명함에도 한글 서예가라고 적혀 있습니다."
▲ 주시경 마당을 찾은 권명원 씨 주시경 마당을 찾아 주시경과 헐버트 선생에게 상 받은 기쁨과 앞으로 다짐을 전하고 있는 권명원씨와 필자
ⓒ 김슬옹, 정성현
권명원씨는 한글학회 근처에 있는 주시경 마당에 들러 상을 받은 의미를 더 새겼다. 개화기 때의 한글 선각자인 주시경과 헐버트의 삶과 한글 이야기를 필자한테서 듣고 두 분이 자신이 상을 받은 것을 축하해 주시는 것 같다고 기뻐했다.

특히 헐버트는 미국인으로서 한글을 가꾸고 알리기 위해 일생을 한국에서 바쳤으니, 그분에 대한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라도 미국에서 한글 활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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