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게 대통령도 탄핵해 봤지만...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다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 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한다. <기자말>
[김윤영]
홈리스 야학이 있는 우리 단체 사무실 부엌 선반에는 야학 학생들 이름이 써진 개인 컵이 빼곡히 있다. 그중 한 컵에는 잘게 찢은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컵의 주인은 이름을 써놓아도 아무 컵이나 사용하는 사람들의 손을 피하고자 청테이프를 문질러놓았다고 한다. 더러워 보여야 남의 손 안 탈 테니까. 키득거리며 전하는 컵의 사정엔 나름의 전략이 스며있었다. 낙후한 것만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던 경험이 녹아 있는 빈자의 전략이다.
김남주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시는 종과 주인이라는 짧은 시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며 깔보는 주인의 목을 낫으로 내려친 종의 이야기. '바로 그 낫으로'라는 한 어절, 한 어절이 똑똑 떨어지는 행으로 끝나는 이 시에 담긴 서늘한 분노는 짜릿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이토록 강한 심상에 도달한 적이 없다.
선명한 적대감이 그린 전선을 마음 놓고 옳다고 여기기에 내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더 복잡한 지도위에 있었다. 궁중족발 사장 내외를 내쫓기 위해 300만 원이던 월세를 1200만 원으로 올리고, 돈 없으면 빨리 나가라 재촉하던 건물주는 "내가 바로 촛불 시민"이라 그악거렸고, 창동역과 아현동의 오랜 명물이던 포장마차 거리는 새로 생긴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에 사라졌다. 거리의 홈리스를 내쫓는 이들은 최저시급보다는 조금 더 준다는 일자리를 찾아왔을 법한 용역업체 경비원들이다.
우리 단체 사무실로는 항의 전화도 걸려 온다. 이번 달 월세도 대출받아 냈는데, 가게 앞 노점상에서 물건이 팔릴 때마다 열불이 터진다는 소상인이다. 노점상을 옹호하는 너희도 밉단다. 딱한 사람들끼리 치고받는 구체적인 현실을 살다 보면 이들이 하나의 낫이 되어 세상을 바꾸자는 말은 허황된 것 아닌가 슬픈 의심만 자꾸 솟는다.
▲ 2016년 5월 31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옥바라지 골목이 재개발 사업으로 허물어지고 있다. |
ⓒ 유성호 |
도시를 아름답게 만든다고 '디자인거리'니 '뉴타운'이니 '신속 통합 기획'이니 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부터 뽑혀갔다. 빈곤의 자리를 지우는 도시 개발의 문법은 개발로 인해 사라진 것들을 누추하다 여기는 마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난한 이들을 도심지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 두려운 것, 위협으로 느낀다. 사회의 안전을 함께 쌓아 올리는 대신 각자의 담장을 알아서 쌓고 살기를 권하는 도시에서 생존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은 소수의 특권이 되고 있다.
1995년 한국의 빈곤율은 8.5%였으나 2021년 한국의 빈곤율은 15.1%다.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그에 합당한 수준으로 모두의 생존이 확보된 것은 아니다. 발전한 나라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위기가 없더라도 꾸준히 빈곤을 만드는 사회가 되었다.
15%의 빈곤율이라지만 빈곤의 위험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사람은 이보다 더 많다. 약 40%에 달하는 노인 빈곤율이나 27%에 달하는 장애인가구 빈곤율은 노동소득이 사라지는 순간 빈곤을 면하기 어려운 이 시대 장삼이사들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지는 언제나 필요한 수준보다 부족하고, 성장기에 확보한 노동자들의 권리는 경제위기를 빌미로, 혹은 비정규직 도입과 같은 '혁신' 조치에 따라 무너지고 있다.
IMF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한국에 상륙한 신자유주의는 사회경제 구조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도 침투했다. 위기 상황에서 사회가 나를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을 체득하며 살아온 이 시대의 사람들, 그저 평범하게 살기 위해 죽을 듯이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은 타인과 사회를 돌볼 여력이 없다. 불안정한 노동, 낮은 임금, 높은 월세와 물가, 천연덕스럽게 많은 0자를 붙이고 있는 사치품들 사이에서 자신을 건사하는 동시에 세계를 구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지 가늠조차 서지 않는다.
슬픈 것은 각자도생을 향한 경쟁으로 주조된 이 세계를 벗어날 길이 없어 기어이 일부가 되는 우리 모두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피해 조사를 위해 경매법원을 찾은 한 활동가는 젊은 사람들을 보고 말을 걸었다. 전세사기 피해자시면 설문조사 좀 부탁드려요. 모자를 눌러쓴 젊은이들은 경매 입찰자라 답했다.
전세사기 피해 건물이니 경매에 참여하지 말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대열을 지나 최저의 낙찰가를 통해 내 집 마련, 혹은 월세 받는 미래를 위해 달려온 또래의 젊은이들. 일상적으로 타인에게 작은 악의조차 쉽게 품을 리 없는 이들조차 경매 입찰자가 된다. 생존하기 위해.
그러니 '나는 시인이 아니라 전사'라는 김남주의 말은 너무나 호젓하고 당당해서 지금의 시대에는 도리어 어색하게 여겨진다. 세상을 바꾸자는 말은 왜 이제는 용감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가. 엄혹하던 그 시절의 정의와 오늘의 정의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그날은 반드시 온다
남은 것은 개털들뿐이다
나라 안에 이렇다 할 빽도 없고
나라 밖에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개털들만 남았다 감옥에
- '개털들' 중, 김남주
시원하게 대통령도 탄핵해 봤지만 세상은 별반 바뀌지 않았고, 법이라도 바꾸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손 빠른 공무원들이 시행령이니 시행규칙을 달달달 붙여대면 법조차 소용없어지기 일쑤였다. 복잡하게 꼬인 이해관계 사이에서는 현실을 바꿀만한 별다른 묘책이 없어 궁색해지기도 쉽다. 세상은 그렇게 감옥이다. 개털들의 감옥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함께 모여 목소리 낼 이유가,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한뎃잠 자는 홈리스라 할지라도 행색 따라 사람 솎아내는 경비원들에게 울화가 나고, 아무 때고 잡아 불심검문 일삼는 경찰에 모욕감을 느끼는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기후재난에 반지하에서, 논밭의 비닐하우스에서, 지하보도에서 참변을 당하는 이웃을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망가진 사회, 볼품없는 인생일지라도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 한 조각쯤은 누구에게나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 7일 서울 강남대로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연합뉴스 |
석탄발전노동자들은 산업 전환에 따른 일자리 상실이 두렵지만, 지구와 일자리를 함께 지키는 정의로운 전환을 일구겠다고 선언했다. 혁명, 전사 같은 말들이 멀게 느껴질지라도 그럼에도 한 발을 떼어보는 용기가 모여 새로운 길을 연다.
윤석열 대통령의 '약자 복지'는 가난한 이들을 '약한 사람'의 자리에 주저앉히지만, 김남주의 시 속에 등장하는 가난한 이들은 빼앗긴 서러움을 동력으로 세상을 바꿀 가능성, 잃을 것 없으니 물러서지 않을 사람들, 그리고 아주 보편의 존재다.
'약자 복지'는 '약자'라는 담을 세워두고 담 너머로 빵이나 던져주는 일이지만, 가난한 이들이 보편의 존재가 될 때 우리는 그 담을 함께 무너뜨릴 수 있는 이웃이 된다. 제대로 이겨본 적 없을 뿐 자유를 모르지 않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날, 그날은 반드시 온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입니다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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