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대통령이 쏘아올린 '환단고기', 위서 넘어 무엇을 물어야 할까
[김옥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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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교육부·국가교육위원회·법제처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재명 대통령, 김민석 국무총리, 윤창렬 국무조정실장. |
| ⓒ 연합뉴스 |
마침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언급하면서, 한국 사회에 오래 쌓여 있던 역사 인식의 갈등이 다시 떠올랐다(관련기사: 대통령 '환빠' 언급 일파만파... "그러면 반지의 제왕도 역사"
https://omn.kr/2gdqh). 주류 역사학계, 이른바 강단 사학은 곧바로 반응했다. <환단고기>는 "역사성이 없는 가짜 책이며 따질 값어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을 말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까지 '비학문적', '사이비'로 몰아붙이는 태도도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 논쟁은 한 권의 책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리는 데서 끝날 수 없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물음은 그 너머에 있다. 왜 이 책은 자꾸 사회적 논쟁의 한가운데로 불려 나오는가. 왜 '위서'라는 판정에도 이 논쟁은 사라지지 않는가.
사실이냐 아니냐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역사를 다루는 데에는 언제나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사실을 따지는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뜻을 살피는 자리다. 강단 사학은 앞자리에 매우 엄격하다. 증명되지 않으면 역사로 다룰 수 없다는 원칙은 학문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 하나로 모든 물음을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문제가 생긴다.
성서 해석을 떠올려 보면 이 점은 더욱 또렷해진다. 오늘날 성서학은 창조 이야기나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두고, 그것이 글자 그대로 있었던 일이냐만을 놓고 다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야기들이 어떤 상징과 세계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해석의 자리가 된다. 신화적 말과 상징은 곧바로 거짓이 아니라, 사람이 역사와 삶을 이해해 온 오래된 생각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눈길로 보면, 단군과 상고사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유난히 굳어 있다. 단군을 '신화'로 묶는 순간, 그 이야기는 곧바로 역사도 학문도 아닌 자리로 밀려난다.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왜 이 이야기는 수천 해 동안 되풀이되어 전해졌는가. 그 안에는 어떤 공동체의 기억과 삶의 뿌리가 담겨 있는가.
<환단고기>도 마찬가지다. 설령 이 책이 뒤늦게 엮인 글로 밝혀진다 해도, 그 뜻이 몽땅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는 한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느꼈던 역사 상실의 아픔, 스스로의 존엄을 되찾고자 했던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뜻의 자리를 읽어내는 일까지 외면한다면, 그것은 학문을 지킨다기보다 설명해야 할 몫을 피하는 태도에 가깝다.
식민 사관과 강단 사학의 닫힌 틀
이 논쟁을 이해하려면 식민 사관 문제를 비켜 갈 수 없다. 일제강점기, 이병도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강단 사학은 식민 지배를 그럴듯하게 꾸미는 역사 인식과 얽혀 있었다. 조선은 스스로 발전할 힘이 없었고, 고대사는 신화와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식민 지배 논리와 맞물려 돌아갔다.
그 결과 단군은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이야기 속 인물로 밀려났고, 상고사는 학문이 닿기 전부터 이미 의심스러운 영역, 나아가 사이비가 드나드는 곳으로 낙인찍혔다. 문제는 해방 뒤에 이런 인식이 제대로 돌아보고 씻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 역사학은 학문적 안정을 다지는 과정에서 일본 학계가 만든 실증 연구 틀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는 분명 값진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그와 함께 고대사를 바라보는 생각의 폭과 물음은 크게 줄어들었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빈칸으로 남았고, 그 빈칸은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처럼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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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 서울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 한국 상고사(上古史)를 다룬 책 '환단고기'가 놓여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2일 업무보고에서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환단고기에 대해 '문헌이 아니냐'고 물은 것과 관련해, 야권은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평가받는 책이라며 일제히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2025.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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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환단고기> 언급도 어느 한 책을 공식으로 세우거나 두둔하려는 뜻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친일 중심의 역사 인식과 식민 사관의 흔적을 넘어, 우리 역사 서술의 틀 자체를 다시 묻는 몸짓에 가깝다. 왜 고대사가 나오기만 하면 '민족주의냐 사이비냐'라는 극단적인 틀만 되풀이되는가. 왜 역사학은 대중의 물음 앞에서 설명보다 훈계부터 내놓는가.
상고사 경전들이 던지는 또 다른 물음
<환단고기>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도 비슷한 자리에 놓여 있다. 실증 기준으로 보면 논쟁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문학 눈길로 보면 이 글들은 우리 겨레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정신의 기록이다.
천부경은 우주와 인간을 하나의 질서로 바라보려는 생각이고, 삼일신고는 하늘과 사람, 삶의 관계를 마음의 문제로 끌어온다. 참전계경은 그 생각을 삶의 태도와 살림의 길로 잇는다. 이 글들이 보여 주는 사유의 깊이는 '미개한 고대 사회'라는 식민 사관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 지금의 물음
요즘 역사 바로 세우기 움직임이 몹시 뜨겁다. 교육계에서도 역사 바로 세우기를 외치며 힘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말하기를 꺼리거나 피해 왔던 주제들이 이제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오르내리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변화의 기운은 분명하다.
그러나 식민 사관 문제를 조금만 깊이 다루다 보면, 반드시 이병도 학맥으로 이어지는 강단 사학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과의 만남은 대개 편안하지 않다. '학문적이다', '과학적이다'라는 말을 앞세운 주류의 반응은 비판을 넘어 거의 몰아붙임에 가깝다.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곧잘 비학문적이거나 감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이번 흐름이 마냥 부담스럽지만은 않다. 오히려 반갑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했던 의심과 질문이 이제는 사회 전체의 공적인 물음으로 옮겨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과거를 미화하자는 것도, 무작정 뒤집자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당연한 듯 굳어 버린 틀을 다시 살펴보고, 설명되지 않은 빈자리를 정직하게 마주하자는 일이다. 침묵도 단죄도 아닌, 열린 물음과 책임 있는 설명 그리고 차분한 토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환단고기> 논쟁은 소동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역사 인식을 품고 살아갈 것인지를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제는 질문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질문 위에서만 비로소, 역사도 우리도 바로 설 수 있다.
- 교육희망네트워크 상임대표 · 하늘씨앗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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