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의원, 23일 자 '요미우리신문' 기사 봤나요?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9. 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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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대마도에서 진행된 이승만 바로 알기

[김종성 기자]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25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기념관 조기 건립을 위한 이승만 바로 알기 세미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권은 이승만주의를 표방한다. 이승만의 생각과 철학으로 대한민국을 개조하려 한다. 25일 나경원 의원이 주도하는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지원 국회의원 모임'이 국회의원회관에서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조기 건립을 위한 이승만 바로알기 세미나'를 개최했다.

국회의원 58명이 참여하는 모임의 이날 행사에는 주호영 국회 부의장과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비롯해 의원 30여 명이 참석했다고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나경원 의원은 "오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윤 정권은 이처럼 이승만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올바른 이해를 돕는 자료는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에 필요한 자료는 윤 정권 밖에서 제공되고 있다.

23일 자 <요미우리신문>은 윤 정권이 알려주지 않은 그런 자료를 보여준다. 이 신문은 전날 대마도(쓰시마섬)에서 한복과 북과 꽹과리가 등장하는 공연과 함께 거행된 제주 4·3 위령제 소식을 전한다.

대마도 사람들이 4·3 위령제를 거행하는 것은 가까운 섬에서 일어난 비극이 안타깝고 슬프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학살의 결과가 자신들의 섬 앞에서 확인됐기 때문이다. 학살 피해자들의 유해가 대마도 앞바다에서까지 발견됐던 것이다. 이런 일이 해양지역 사람들의 인류애뿐 아니라 종교 관념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가 위령제 의식에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 유해가 표착한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 위령제'라는 제목에서 <요미우리신문>은 22일 위령제에 한·일 양국 시민 약 110명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제주 4·3을 "조선반도의 남북분단에 반발하는 제주도민들의 무장봉기"에서 발단한 사건으로 규정한 이 기사는 다년간의 진압으로 인해 주민 수만 명이 희생됐다고 소개했다.

위령제는 건재업자인 에토 유키하루씨가 2007년 5월 건립한 해안가의 공양탑 앞에서 거행됐다. 신문은 그가 탑을 세운 이유에 관해 "매장에 관계했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해안에 공양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작년 10월 9일 자 <마이니치신문> '쓰시마에서 본 조선반도의 분단'은 에토씨가 이 일에 헌신하게 된 계기를 알려준다. 기사는 그의 아버지가 2007년 2월 타계하기 직전에 "(에토씨에게) 매장 현장을 처음으로 안내하고 '진혼해 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전한다. 당시 80세인 아버지가 4·3 희생자들의 무덤을 아들에게 최초로 보여주면서 그 같은 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떠내려오는 유해들을 아버지가 매장했고 그곳을 약 60년간이나 지키다가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아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랬으니, 에토씨에게는 아버지의 부탁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돼 공양탑을 세우고, 금년까지 다섯 차례의 위령제를 거행하게 됐다.

제주CBS 기자들이 작성한 2019년 11월 26일 자 <노컷뉴스> '손발 철사로 묶여 ··· 대마도로 흘러간 제주 4·3 희생자'에 따르면, 문재홍 제주대 지구해양과학과 교수는 "제주도 주변에 흐르는 해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쿠로시오해류에서 갈라져 나온 대마난류여서 남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흐른다"라며 "제주도 인근 해상에 물체를 떨어트리면 그 흐름을 따라서 대마도로 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 뒤 문 교수는 "바람의 영향으로 지체될 수 있지만 보통 2~3일이면 대마도까지 간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해류의 특성이 4·3 희생자들과 에토씨 집안을 연결시켰던 것이다.

굳이 이승만기념관을 세우고자 한다면
 지난 3월 2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9주년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화환이 놓여있다.
ⓒ 연합뉴스
나경원 의원 발언에서도 나타나듯이 윤 정권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에 연결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실체는 그런 연결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위험한가를 역설한다. 미군정과 더불어 이승만은 수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대마도로 떠내려가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얼마나 많은 유해가 제주도에서 대마도로 흘러갔는지는 대마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위 <노컷뉴스>에 등장하는 오에 마사야쓰 전 <니시니혼신문> 대마도 주재기자는 "제주 4·3과 한국전쟁 시기에 대마도 남동쪽인 이즈하라뿐만 아니라 대마도 서쪽 해안, 중대마도 무인도인 구로시마섬까지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왔다"고 설명했다. 기사에 따르면, 지금도 대마도 주민들 중에는 한국인 시신이 떠내려온 일을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시신의 국적을 기억하는 것은 옷차림 때문이었다고 현지인들은 증언하고 있다.

4·3 참여자들을 바다에 빠트려 죽이는 일은 항쟁이 절정에 달한 1948년뿐 아니라 그 뒤에도 있었다. 이 점은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003년에 펴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보고서는 이승만 정권이 "4·3사건 관련 재판을 받았거나 수형 사실이 있는 사람들"을 이른바 좌파 전향자 단체라는 국민보도연맹에 편입시켰다고 한 뒤,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 발발을 명분으로 이들을 예비검속한 다음에 벌어진 일을 이렇게 기술한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 포항경비부 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예비역 준장은 1950년 7월 초 자신의 명령으로 경주·포항·영덕 일원에서 예비검속된 주민 200여 명을 군함에 태워 바다로 나가 총살한 뒤 모두 수장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4·3 참여자에 대한 수장이 이 한 건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보고서는 그해 8월 4일의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제주경찰서·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을 제주항으로 끌고가서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수장시켰다.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제주항 부두 파견 헌병대에서 경비 근무를 했던 장시용의 증언에 의하면, 밤 9시경에 50명씩 태운 차 10대가 부두에 도착하여 알몸 차림의 500여 명의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아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 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바다에 버려진 사람들이 대마도 앞바다로 흘러가고 그중 일부가 현지인들의 손으로 수습돼 매장됐다. 에토씨가 주최하는 위령제가 이달 22일에 거행된 것은 그때의 충격이 8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대마도인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음을 의미한다.

반대표를 던지는 국민들을 바다에 던지는 일이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니, 이 같은 희생자 수장이 이승만 정권의 권력 유지 방식 중 하나였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승만 정권의 정체성이고, 이승만이 추구했다는 자유주의의 실체다. 윤 정권이 내세우는 이승만주의의 실상은 그것이었다.

굳이 이승만기념관을 세우고자 한다면, '대(大)를 위해 반대파를 희생시킨다'는 명분으로 4·3 참여자들을 바닷물에 빠트리는 것이 이승만주의의 본모습이었음을 반영하는 기념관을 세워야 한다. 이런 진실이 반영되지 않는 기념관은 거짓 기념관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승만 바로알기를 운운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이승만 바로 알기는 25일 국회의원회관이 아니라 22일 대마도 해안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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