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가 왜 이런 진보적인 활동을 하느냐고?
[조경일 기자]
존재에 대한 고민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면, 북한에서 계속 살았다면 아마 없었을 고민이다. 나는 금지된 선, 북에서 남으로의 경계를 넘었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정착지인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한국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었다면 없었을 고민이다. 내가 스스로 나의 '탈북'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나를 '탈북'이라는 정체성으로 불러낸다.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력서에 출신 고등학교 항목 난을 비워두면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어느 학교를 나왔냐고. 굳이 거짓말로 둘러대지 않는 한 내 정체성은 곧바로 드러난다.
북에서 14년을 살았고 남에서 20년 차를 살고 있지만 연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의 북한스러운 말투와 출신 학교를 숨길 수 없다면 나는 늘 북한 출신, '탈북자'일 뿐이다. 물론 이제는 이런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먼저 말한다. 사람들이 질문하기 전에 나를 밝히는 게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하다. "북한 출신이 뭐 어때서?"라는 생각이 20년 전부터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내가 활동한 세대는 학생운동권 끝물
▲ 성균관대 재학 당시 금잔디 광장에서 율동패 회원으로 율동하던 장면 |
ⓒ 조경일 |
나는 이들이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거리에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거리에 나선 사람들에게 공감이 됐다. 나도 불과 얼마 전까지 목소리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배고파서 구걸할 때, 억울해서 울분에 찼을 때, 죽을 만큼 아팠을 때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준 이 하나 없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 거리를 배회하고 구걸하며 버려진 삶을 살았다. 나는 거리에 나선 이들이야말로 '아픈 자, 배고픈 자, 억눌린 자, 목소리가 없는 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실하지는 못했지만 교회를 다니며 성경 공부도 했던 터라 '예수님이라면 사회공동체에 어떻게 참여했을까?'에 대해 가급적 생각하고자 애썼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내 기준이다. 거리의 집회를 바라보며 "귀족 노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본질도 전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도 약자였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탈북'이라는 소수자로 약자의 그룹에 속하기 때문이다. 탈북 출신 중에서 아마 나와 같은 이력을 소유한 사람이 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돌아보니 내가 활동한 세대가 학생운동권 끝물이었다.
▲ 대학원 다니던 시절 참석한 '선거 제도개혁' 집회 |
ⓒ 조경일 |
내가 바라본 한국 사회는 압축 성장만큼 고통도 압축되어 있었다. 거리의 목소리는 성장에 가려진 고통들이었다. 한국이 매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를 거의 내어주지 않는 것은 상징적인 고통의 지표다. 초등학생이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하는 나라는 아마 한국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 가장 낮은 문맹률 그 이면에는 학생들의 자살을 부추기는 야수 같은 경쟁 교육시스템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거리에 섰던 나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 조경일 작가(피스아고라 대표) |
ⓒ 조경일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