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BTS 가사에 울컥” 청각장애 아미의 행복한 덕질

정고운 2024. 10. 1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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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농인들의 이야기
“춤과 가사면 충분” 할 거 다 하는 농인의 덕질
농인은 배제된 콘서트… 개선 위해 고군분투


청각장애인 안정선(49)씨는 8년차 농아미(청각장애인을 이르는 ‘농인’과 BTS의 팬덤명 ‘아미’를 합친 말)다. 안씨는 매일 퇴근 후 BTS의 뮤직비디오를 틀고 한글 자막을 켠다. 한국농아동교육연구소 대표로서 농인 권리를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그지만,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수천만명의 아미 중 하나가 된다. 안씨는 SNS 팬계정은 물론 매년 만나는 농아미 친구들까지 있을 정도로 덕질중이다.

춤·가사·박자로 느끼는 노래… 특별한 덕질법

방탄소년단 멤버 진의 전역 기념 행사에 참석한 안정선씨. 안씨 제공

안씨가 BTS의 곡에 빠진 건 예쁜 노랫말 때문이다. 그는 “BTS의 가사에는 항상 메시지가 있다”고 전했다. 농인에게 가사는 멜로디보다 중요한 요소다. 음정은 알 수 없지만 농인 전용 이어폰으로 들으면 진동을 통해 박자를 느낄 수 있다. 안씨는 신나는 비트의 댄스곡을 가장 좋아한다.

10년 차 농인 시즈니(아이돌 그룹 NCT의 팬덤명)인 이차주(34)씨는 NCT의 안무에 푹 빠졌다. 연습실 안무 영상을 자주 보는 그는 가사를 읽고 뜻을 이해한 다음 멤버들의 입 모양과 춤을 대조하며 노래를 감상하는 편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는 가사를 수어로 바꿔 표현해 본다. 수어 문법은 한글 문법과 달라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려면 연구가 필요한데, 이씨는 가사를 곱씹으며 고민하는 시간이 즐겁다고 했다. 긴 연구가 끝나면 수어 버전으로 새로 태어난 노래를 박자에 맞춰 불러본다.

이씨는 NCT 멤버들에게 어울리는 수어 이름을 만들었다. 수어 이름이란 사람의 고유한 특징을 수어로 표현한 시각적 이름이다. 이씨는 “멤버들 모두에게 의미 있고 멋있는 이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몇달동안 고민했다”면서 “뿌듯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멤버들을 직접 만나게 되면 꼭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농인 팬이기에 즐길 수 있는 소소한 덕질이다.

“콘서트장에 수어 통역사 좀…” 외로운 외침

지금껏 누구보다 행복한 덕질을 해왔다는 이들에게도 처음 현실의 벽을 마주한 순간은 마음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관람한 안정선씨. 슬로건에는 '농아미도 방탄 좋아해'라고 적혀있다. 안씨 제공


“콘서트에 4만 5천명 정도가 왔는데… 내내 혼자인 기분이었어요”

안씨는 2018년에 갔던 첫 콘서트를 씁쓸하게 떠올렸다. 당시만 해도 BTS 콘서트에는 수어 통역이 제공되지 않았다. 안씨는 “농인에게 수어 통역이 없는 건 청인에게 소리가 없는 것과 같다”며 “통역이 없으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떤 노래를 부르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다”고 전했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 콘서트에 간 안씨는 공연장에 배치된 두 명의 수어 통역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미국은 공연장 수어 통역사 배치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 이후 안씨는 소속사에 메일을 보내 국내 콘서트에도 통역사를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덕분에 다음 콘서트에서 통역사 한 명이 배치됐다. 하지만 무대 쪽이 아닌 관객석 옆자리에 있어 무대와 통역사를 번갈아 봐야 했다.

안씨는 정확한 요청사항을 적어 다시 메일을 썼다. 안씨가 sns에 사정을 알리며 쓴 글이 4만 명의 아미들에게 공유되자 소속사로부터 승낙 메일이 왔다. 이제 하이브는 농인 관객의 요청이 있을 경우 통역사를 섭외해 전용 관람석을 제공한다. 안씨는 공연장에 오는 농아미가 늘어 뿌듯하다면서도 “통역사의 위치는 아쉬웠다는 평이 있는 걸 보면 아직 농인과 수어 통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NCT DREAM 콘서트를 관람한 이차주씨. 이씨 제공


이씨의 덕질은 더 험난하다. 치열한 티켓팅을 거쳐 일반석을 예약하고 고객센터에 수어 통역사 배치를 요청했지만 ‘소리를 못 듣는데 콘서트엔 왜 가냐’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결국 사비로 통역사를 섭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불편함 없이 공연을 관람하는 건 제값 주고 티켓을 산 관객 모두가 동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다. 이씨가 매번 거절당하면서도 계속해서 통역사 배치를 요구하는 이유다.

이씨는 아이돌 소속사들이 배리어프리를 인식하고 공연 문화를 개선하려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그러면서 “무조건 어렵다는 답변 말고 알아보겠다는 말만 해줘도 덜 서러울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는 현재 ‘잘 보이는 공연’을 위한 수어통역사 배치 등 매뉴얼 제작 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덕질도 인생도 끝까지 달릴 거예요, 내 가수들처럼!

방탄소년단은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 뮤직비디오에서 ‘댄스’ ‘평화’ 등의 국제 수어를 표현했다. ‘퍼미션 투 댄스’ 뮤직비디오 캡처

BTS의 싱글 앨범 ‘버터(Butter)’의 수록곡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 뮤직비디오에는 국제수어가 등장한다. BTS는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하면서 성별·국적·인종을 초월한 여러 문화권의 청자들을 고려한 행보를 보였다. 리더 RM은 2019년 청각장애 특수학교에 1억원을 기부했다.

안씨는 “BTS 덕분에 글로벌 농아미들을 만나 각 나라의 수어를 배우고 친목을 다질 수 있게 됐다”면서 “‘퍼미션 투 댄스’ 뮤직비디오에 세계 농아미들이 감동했다는 걸 모든 팬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이씨는 ‘최애’ 멤버인 마크를 보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는 “마크는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매사 긍정적으로 헤쳐나가는 사람”이라며 그처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덕질하다보니 팬 생활이 즐거워졌다고 전했다. 이어 “마크가 끝까지 열심히 달려가고 있으면 함께 끝까지 달리겠다”고 다짐했다.
[농담]은 일상 속 농인들을 취재합니다. 청인사회와 같은 듯 다른 농사회의 모습, 소리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쾌하고 진실한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정고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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