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끌어안고 싶은 '마음의 고향', 여중의 추억
9월 1일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여권통문의 날'입니다.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주축이 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요? 교제 폭력으로 여성이 죽고, 불법촬영이나 리벤지 포르노만으로 기가 막혔던 성범죄는 이제 딥페이크로 상상할 수 없던 선을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당차게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 시대 지역 곳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조명합니다. <편집자말>
[월간 옥이네]
▲ 사진을 보고 있는 옥천여중 17회 졸업생 조명숙씨. |
ⓒ 월간 옥이네 |
"이 나라 반만 년의 커다란 거름
금강의 기슭 속에 꿈이 서리고
아늑한 관성터에 이름 높이며
자리 잡고 진리 닦는 배움의 전당
그 이름도 빛나는 희망의 옥여"
가사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50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애잔한 마음으로 옥천여중고의 교가를 불러보았습니다(이 교가는 1978년 8월 30일 김영호 작곡, 유진방 작사로 50년 동안 불려왔고 현재 옥천여중 교가로도 불리우고 있다 - 기자 주). 가사가 좀 틀렸더라도 선후배님들 이해와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옥천여중이 옥천 시내에 있습니다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구읍에 학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일부분은 개인께 분양이 돼 조각이 나 있지만, 학교가 위치해있을 때는 구읍의 상권도 형성돼 있었고 파출소도 근처에 있었으며 등·하교하는 학생들로 거리는 언제나 활기차 있었습니다. 구읍 전체가 시끌벅적한 상태로 생기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교문이었던 대문은 그대로 있습니다. 집 안이야 볼 수 없지만, 한치봉 선생의 교육공로비도 보고 싶고 겨울이면 바람이 솔솔 들어오든 교실의 창문들도 그립습니다. 교무실 뒷 정원의 라일락 꽃향기가 온통 학교를 그윽하게 물들였고 등·하교하던 그때가 참 행복했습니다.
에피소드로 우리 넷째 언니가 옥천여고에 다니고 셋째 언니는 가정에서 신부수업을 받으며 가사일을 돕고 있던 시절,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가 라일락 잎을 씹으면 사과향이 난다고 씹어보라고 했습니다. 잎을 씹은 셋째 언니의 표정은 세상에는 없는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너무 쓰니까 넷째를 잡으려고 했지만, 36계 줄행랑을 친 다음이었습니다. 너무 화가 난 언니는 아마 지금도 넷째를 골탕먹이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아름다운 추억의 한 토막이지요. 익모초즙보다는 더 쓴 라일락의 잎새에 속지 마세요. 절대 사과향이 아니랍니다.
조명숙씨가 2년 전, 옥천 시니어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썼던 옛 옥천여중에 대한 글이다. 동이면 석탄리 안터마을이 고향인 그는 결혼 후 서울 생활을 하다 20여 년 전 명예퇴직한 남편과 함께 고향에 돌아왔다.
교육열이 대단했던 부모님 아래, 3남 6녀 형제자매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조명숙 씨. 죽향초와 옥천여중을 다니던 시기는 그의 인생에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회상한다. 옥천 최초의 여성교육 기관이자 옛 99칸 한옥을 학교 건물로 활용했던 '옥천여중'. 옥천여중 17회 졸업생으로, 고택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던 그를 만나 옛 학교의 모습을 그려봤다.
가정집 같았던 학교 건물
"옥천여중이 99칸의 대단한 고택이었다는 것은 지금 처음 알았어요. 어릴 적에는 가정집 같다고만 생각했지요. 학교 정문에 한치봉 선생의 공로비가 서 있고, 교정에 라일락꽃과 단감나무, 가운데 정원이 있어서 꼭 궁궐의 마당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어요.
▲ 졸업사진 속 학생 중 한 명만 꽃목걸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윗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명숙씨. |
ⓒ 월간 옥이네 |
"당시에 국회의원 딸과 한치봉 선생의 손녀, 또 육영수 여사의 동생도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음악·미술·가사 과목 선생님이 여성이었고, 다른 과목은 모두 남성 선생님이셨지요. 부잣집 출신이 많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죠."
가정 형편을 떠올릴 때 그는 '중산층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다만 부모님의 자녀교육열이 높았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형제자매 여럿 중 한두 명만 자녀를 학교에 보내곤 했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부모님은 3남 6녀 모두를 학교에 보냈다. 그가 지내던 안터마을은 당시 120호 규모였는데, 그가 입학할 당시에는 3명, 졸업할 무렵엔 13명 정도가 옥천여중에 다녔다.
"돌이켜보면 주변에서들 부러워했어요. 우리 큰언니 때는 동네에서 한두 사람만 초등학교를 보내는 시절인데, 그때도 언니 학교를 보냈으니까요. 언니 또래 중에는 문맹자도 많았고요. 제가 죽향초 입학할 때엔 아버지가 하얀 두루마기를 입으시곤 직접 데려다주시기도 했어요. 아버지한테 참 고마운 마음이에요."
동네 총각들이 딸들에게 접근할 것을 걱정해 등·하교 외에는 바깥 활동을 막기도 했던 아버지는 밭에서 일하다가도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 옥천여중 17회 졸업생 조명숙씨의 졸업사진. |
ⓒ 월간 옥이네 |
"설움은 안 받았어도 대우는 못 받으며 자란 것 같아요. 여섯 자매 아래로 내리 아들이 셋 있었는데, 그래도 '남존여비' 사상이 있던 때잖아요. 예를 들어 집에서 가마솥에 밥을 하면, 밥을 푹 퍼다가 계란 터뜨리고, 참기름 비비면 얼마나 맛있어요. 그걸 아들 입에만 넣어주고 딸들은 비벼줄 때 몰래 가서 한 입씩 먹고 그랬지. 그때는 아들이 '보험'이었잖아요."
남녀차별을 경험하며 성장했지만 조명숙씨는 "내가 딸이지만 아들 못지않게 은혜를 갚는 자식이 되고 싶다"고 다짐하곤 했다고.
"교육을 아주 못받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저는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요. 고등학교 앞을 지날 때면 더 배우고 싶어서 아직도 마음이 울렁울렁해요. 여성이 직업 갖는 경우는 간호원이나 교사 정도가 있었지요. 다시 공부한다면 대학 국문학과에 가서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 옥천여중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
ⓒ 월간 옥이네 |
교실에서는 학생 사이에 또래 모임에 해당하는 '클럽'이 유행하기도 했다. 한 반에 5~6개 정도의 클럽이 있었는데, 마음 맞는 또래끼리 저마다 이름을 붙여서 어울려 다니는 일이 많았다고. 라일락, 국화 등 꽃 이름을 따서 짓곤 했는데 이러한 또래 모임의 존재가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했던 모양. 조명숙씨는 학교에서 "클럽 금지령을 내렸다"고 말한다.
방과 후에는 학교에서 미술과 피아노와 같이 예체능 교육을 받을 기회도 있었다. 요즘 같은 방과후 프로그램인 셈. 하지만 그는 "학생 대부분이 배우고 싶어도 신청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통 교직원 자녀가 피아노나 방과후 수업을 들었거든요. 무료라고는 해도 은연중에 '내가 감히 들어도 되나'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게다가 방과 후엔 집에 돌아가 농사일을 도와야 했으니까, 서둘러 돌아가기 바빴어요."
옥천여중 인근은 매점, 신발가게, 잡화점, 파출소 등 여러 시설이 자리해 무척 활기찬 풍경이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잡화점도 한 곳 있었는데 '짱서방네 가게'라 불렸다고. 조명숙 씨는 이곳에 "이야기로만 들었던 '전족'을 한 여인이 있어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그때는 학교에 남자화장실 청소도 당번을 두 명씩 두어 학생들이 하도록 했었는데, 한번은 제가 당번이었지요. 다들 꺼리는 당번이었는데, 불평하지 않고 그걸 맨손으로 청소하고 그랬던 것 생각하면… 좋게 말하면 '착한 학생'이었죠(웃음)."
▲ 옥천여중의 추억. |
ⓒ 월간 옥이네 |
"나는 지금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어요. 딸들, 며느리한테도 할 수 있으면 박사까지 공부하라고 말하곤 하는데 다들 내 마음 같지는 않은가 봐요(웃음).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하는 동창한테는 '우리말 달인(KBS 프로그램)' 같은 데에 좀 도전해보라고 그러기도 하죠. 요즘 세상은 배우고 싶은 만큼 배울 수 있는 것,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월간옥이네 통권 87호(2024년 9월호)
글 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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