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수록 더 우아해지는 4050 특징
2019 제야의 종을 타종한 김예원 변호사의 이름에는 수식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시각 장애 극복한 인권변호사'
김예원 변호사는 시각 장애를 극복했을까?
대수롭지 않게 써왔던 표현이지만 "장애를 극복한다" 라는 말은 사회적 소수자에겐 폭력적인 표현일 수 있습니다.
장애는 극복할 수 있는 것도, 노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장애는 나와 함께하는 것이고, 익숙해진 것인데 왜 우리는 장애를 극복할 대상으로 보는 걸까요.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장애가 불편하지 않도록 어떻게 사회를 만들 것이냐, 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장애인은 나와 너무 먼 존재?"
"장애인은 나와 다른 존재?"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어?"
장애인식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지도 이분법적으로 보지도 말아야.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맞는 말입니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X 비장애인O
“예원아, 너 장애 극복한 거야?”
장애는 하나의 정체성이자 나에게 익숙해진 상태인데 이걸 극복한다는 말을 무슨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한 눈으로만 살아온 내가 어느 날 갑자기 기적적으로 두 눈으로 반짝반짝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장애를 극복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정상인’보다 더 성공한, 더 부유한, 더 유명한 삶을 살면 그걸 ‘극복’한 것으로 봐주겠다는 걸까.
태어나면서 얻은 장애를 대단하게 극복한 적은 없지만, 지금도 극복은 삶의 중요한 화두다. 항상 뭔가를 극복하기 위해좌충우돌 애를 쓰고 있어서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새 내가 정말 극복하길 원하는 것은 매일 주어지는 새날들 속에서 욕심부리며 우왕좌왕하는 나 자신이다.
집은 항상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요리도 살림도 지구를 지켜가면서 잘해야 하고, 세 아이들도 좋은 시민으로 행복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욕심. 한편 변호사이자 활동가, 연구자 일도 더 잘해내고 싶고, 이 사건 저 사건에 다 참견하고 싶고, 근육량도 식견도 날로 늘어나고 깊어져야 하는 이 어마어마한 과욕들 말이다.
_<사람을 변호하는 일> 김예원
위 내용은 차이나는 클라스와 김예원 변호사의 책 <사람을 변호하는 일>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소수자와 소외된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편견이나 동정 또는 배척과 거부의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마음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본래 모습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잊지 않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