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보다 오래 남는 2분, 배우 박해준의 얼굴
스타의 매력은 단순한 외모나 화제성만으로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어떤 장면에서 어떤 태도가 드러나는지, 그 순간들이 인물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능, 영화, 드라마, 유튜브 등 다양한 콘텐츠 속 인물을 하나씩 살펴보며 그 사람이 왜 지금 호감을 얻고 있는지, 그리고 그 매력이 어떤 순간에 드러나는지를 관찰해 봅니다. <편집자말>
[황진영 기자]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이 한마디로 수많은 시청자들의 분노를 샀던 인물이 있다.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2020) 속 이태오, 배우 박해준이다.
불륜이 들통난 순간, 그는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 뻔뻔함이 응축된 대사 한마디에 시청자들은 더 크게 분노했다. 이상한 것은, 분명 미워해야 할 인물인데, 어느 순간 그의 표정과 말투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해 보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점이다.
박해준의 얼굴에는 쉽게 단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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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휴민트> 스틸 이미지. |
| ⓒ 넷플릭스 |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다 30대 중반에 매체 연기를 시작한 박해준은 연기력 논란이 된 적은 없지만, 연기력만으로 평가받기엔 너무 잘생긴 배우다. '한예종 장동건'이라는 별명과 함께 자주 소환되는 대학 시절 사진은 지금 봐도 눈에 띈다.
2002년 발매된 윤상의 4집 앨범 수록곡 <이사> 뮤직비디오에서도 그 시절의 박해준을 볼 수 있다. 이삿짐을 싸다가 만화책을 넘기는 그의 얼굴은 '해사하다'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배우 박정민은 <휴민트> 촬영 당시 배우들과 모인 자리에서, 박해준이 장난처럼 "형 뮤직비디오 봤냐"며 <이사> 뮤직비디오를 틀고 몇 번이고 다시 재생했던 순간을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이 에피소드가 언급되면 박해준은 손사레를 치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주 강하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없던 일로 지워 버리려 하기보다는, 그저 조금 쑥스러워하는 정도에 가깝다. 본인의 꽃미남 시절을 완전히 부정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감을 두는 태도. 그 거리감이 묘하게 사람을 웃게 만든다.
박해준의 첫 영화는 <화차>(2012)다. 주인공 김민희를 쫓아다니는 사채업자 역할을 했던 그는, 이후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았다. 때로는 제자를 때리는 코치로, 때로는 조직의 중간 보스로, 천만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나라를 뒤엎는 쿠데타를 꿈꾸는 군인으로.
그러나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2025) 속 양관식이다. 예전이라면 팔불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이제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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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싹 속았수다> 관식은 금명에게 "수틀리면 빠꾸" 하라고 당부한다. |
| ⓒ 넷플릭스 |
박해준의 얼굴이 오래 남았던 또 하나의 인물은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 속 겸덕이었다.
오랜 연인 정희(오나라 분)의 곁을 떠나 출가한 겸덕은, 한 사람의 시간을 오래 붙잡아 둔 채 살아온 존재였다. 주인공 동훈(이선균 분)과 함께 후계동 길을 걸으며, 그는 자신이 떠나온 시간을 덤덤하게 꺼내 놓는다. 세상과 유리된 고요한 삶을 이어갈 것만 같은 스님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부모 형제 기대 버리고 친구 애인 다 버리고 내가 배신하고 떠난 동네."
그러나 그 대사를 읊는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생각이 날 때마다 잘라내려 했지만, 결국 잘라냈어야 했던 것은 생각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그 고백을 들으면 드라마에 나왔던, 그의 출가 장면이 떠오른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잘려나가는 머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마지막 화에서 동훈이 사준 노란 꽃다발을 들고 정희의 가게를 찾아가는 장면은, 그렇게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정희가 말한다.
"청년으로 떠났다가 중년으로 오셨네."
그 말을 듣고 그는 바로 답하지 않는다.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조용히 입을 연다.
"한 시간 반이면 오는 데를 왜 이십 년 가까이 못 왔나."
"나 니 마음에 걸려라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무슨 낙으로 사니."
정희의 질문에 겸덕은 짧게 답한다.
"행복하게, 편하게."
그 나직한 대답 뒤에 남아 있던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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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TBC 드라마 <모두가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이미지. |
| ⓒ JTBC |
황진만은 어쩌면 황동만이 가 보고 싶은 길을 아주 잠시 먼저 걸어 본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시 한 편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평범하게 직장에 다니던 진만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평생 시를 쓰며 살 수 있으리라 믿었던 꿈을 저버린 채, 현실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한 동생의 월세를 대신 내주기도 하며, 묵묵히 생활인으로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모자무싸> 속 진만은 집에 들어설 때 늘 손에 소주병이 든 검은 봉지를 들고 있다. 안주도 없이 술을 들이키는 그에게 동만은 뭐라도 먹으라며 잔소리를 건넨다. 둘은 말없이 한 공간에 앉아 있다가 결국 말을 섞게 되고, 그 대화는 대개 싸움으로 끝난다. "니가 원하는 게 뭐야? 데뷔야? 성공이야? 말해봐! 도와줄게!"라고 소리치는 진만에게 동만은 "불안하지만 않으면 된다"라고 말하며 커튼을 치고,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간다.
많은 장면에서 우리는 진만이 철없는 동만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변변한 벌이도 없는 동만을 위해 월세를 내주고, 친척들과 동료라 믿었던 영화판의 8인회에게 동만이 무시를 당할 때도, 아지트 문에 붙은 '황동만 출입 금지'를 보고 일갈을 날리다 끝내 주먹다짐까지 하는 모습도 그랬다. 그러나 4화의 한 장면에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힌다.
진만은 한 손에 줄을 잡고 페인트 통 위에 섰다. 삶을 내려놓으려 하는 순간이다. 약 2분여간 카메라는 진만의 얼굴을 비춘다. 초점도 생기도 없는 공허한 눈빛이 화면을 채운다. 대사 한 마디 없이 이어지는 그 순간, 진만의 얼굴에 빠져든다. 동만은 진만의 손을 꼭 붙잡는다. 마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처럼.
박해준이 맡은 역할은 대부분 대사가 많지 않다. <나의 아저씨>의 겸덕이 그랬고, <폭싹 속았수다>의 관식도, 이번 <모자무싸>의 진만도 마찬가지다. 그의 눈빛이 음성으로 전달되는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많은 대사보다 오래 남는 것은, 결국 화면 속 인물을 끝까지 바라보게 만드는 배우 박해준의 '얼굴들'이다.
<모자무싸>에서 우리는 또 어떤 얼굴을 발견하게 될까. 세상을 마지못해 살아가는 진만. 그러나 지켜야 할 존재, 동생 동만이 있어 꾸역꾸역 살아내는 그의 얼굴. 그 얼굴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갈지,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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