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이장'이 왜요? 마을 일에 성별이 어딨나요

월간 옥이네 2024. 9. 2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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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사는 여성들] 충북 옥천의 여성이장 김효순-장명순씨 이야기

9월 1일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여권통문의 날'입니다.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주축이 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요? 교제 폭력으로 여성이 죽고, 불법촬영이나 리벤지 포르노만으로 기가 막혔던 성범죄는 이제 딥페이크로 상상할 수 없던 선을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당차게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 시대 지역 곳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조명합니다. <편집자말>

[월간 옥이네]

1995년 옥천읍 성암1리에서 첫 여성이장(박금순씨)이 선출된 이후 2000년대 중반 옥천읍, 동이면, 청산면에서 여성이장 탄생 소식이 이어졌다. 특히 옥천읍은 여성이장 6명이 선출돼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이장단에도 변화가 시작되는 듯했다. 하지만 현재 옥천군 224개 마을 중 여성이장은 총 9명. 20여 년이 흘렀지만 전체의 4%만이 여성인, 이장단의 성비 불균형은 여전하다.

느린 변화에도 여전히 꿋꿋하게 마을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중 올해 신임 이장으로 선출된 장명순(60)씨와 이장 20년 차인 김효순(66)씨를 만나봤다. 이장이 된 시기는 다르지만 '여성'이장이 눈길을 끄는 시대가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은 같은 이들이다.

[동이면 지장리 장명순 이장] "여성의 섬세한 시각을 믿어요"
 충북 옥천 동이면 지장리 장명순 이장.
ⓒ 월간 옥이네
강원도 삼척이 고향인 장명순 이장은 40년 전 시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충북 옥천으로 왔다. 주민들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 풍경이 좋았다는 그. 정겨운 마을 분위기와 활발한 성격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을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작은 것도 이웃과 나누며 그렇게 동이면 지장리 주민이 됐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마을 일을 맡게 된 건 2020년 부녀회장이 되면서부터. 마을 일을 자신의 일처럼 하던 그를 주민들이 추천한 것이다.

"젊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마을에서 50대면 한창 젊을 때잖아요. 부녀회장을 3년 했는데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어려운 때도 있었죠. 체력도 그렇지만 시간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게 어려웠어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도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직장을 다니면서 마을 돌보는 일이 때론 힘들었지만 '후회 없이 하자'는 성격 덕분에 3년의 부녀회장직을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원래 생활로 돌아오는 듯했으나 이장 자리 공석으로 다시 한번 주민들의 추천을 받게 된 장명순씨.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후회 없이 하자'는 마음이 한 번 더 그를 움직이게 했다.
 동이면 지장리의 모습.
ⓒ 월간 옥이네
"이장 후보로 저 포함해서 두 명이 나왔어요. 한편에서는 직장도 다니고, 경험도 적은 제가 할 수 있겠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못 할 것 없다고 생각했죠."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있었지만 몇몇 주민들의 걱정은 가족들의 염려로 이어졌다.

"이장 후보로 여성인 제가 나오니까 걱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 모습에 남편이 다음에 나가는 건 어떻겠냐고 만류하더라고요. 저를 걱정해서 해준 말이지만 그 말에 꼭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투표로 결정하는 일, 제가 하고 싶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나가서 안 되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되면 열심히 해 볼 거라고 말했죠."

'걱정하지 말라'고 응원해 준 주민들 덕분에 더욱 용기 내 나간 이장 선거, 두 표 차이로 장명순 이장이 선출됐다. 자신을 응원해 준 이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다.

"걱정하는 분보다 응원해 준 분이 더 많았어요. 힘들고 모르는 일 있으면 같이 하면 된다고요.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이장 선거에 '할 수 있다'는 확고한 마음으로 나갈 수 있었죠. 이런 응원을 받고 이장이 됐으니 저를 뽑은 걸 후회하지 않도록 살기 좋은 마을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장이 된 지 7개월, 마을의 불편 사항이 없는지 구석구석 살피느라 하루가 모자란다는 그. 최근 내린 비로 마을 정비하느라 더욱 바빴던 요즘이다.

"비가 많이 와서 마을에 있는 산이 무너졌어요. 근처에 밭이 많은 곳이라 농로에 흙이 잔뜩 쌓였더라고요. 면사무소에 요청해서 포크레인으로 작업을 마쳤는데 비가 계속 오면 또 무너지겠다 싶어서 산사태 대비 보수 건으로 군수님과 면담을 했어요. 얼마 전 옥천읍 양수리에서도 산비탈에서 쏟아진 토사로 인명 피해가 있었잖아요. 사고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더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동이면 지장리의 모습.
ⓒ 월간 옥이네
마을 길 배수구 뚜껑 정비, 쓰레기 무단 투기 등 들여다볼수록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 산더미다. 필요한 일은 바로바로 그의 수첩에 쌓인다.

"나이 먹으니까 자꾸 까먹어요(웃음). 그래서 필요한 건 수첩에 바로 써요. 오늘도 가로등 보수, 반사경 설치, 마을 창고 관련해서 면사무소에 갈 예정이에요."

오전 7시 주민의 면담 요청 전화로 시작된 장명순 이장의 하루는 수첩에 적힌 메모가 지워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오늘은 다행히 직장 휴무일로 이곳저곳 일을 볼 수 있다"며 웃는 그가 이렇게 마을 일에 열심인 이유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불신을 조금이라도 없애고 싶기 때문이다.

"저는 여성이 갖고 있는 섬세한 시각을 믿어요. 당장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불편해질 요소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그 감각을요. 동이면에 22개 마을이 있는데 여성이장이 5명 이상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여성이장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생길 것 같아요.

지금 생각은 5명인데... 나중엔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이상할 만큼 여장이장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려면 저부터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열심히 하다 보면 제가 처음 봤던 오손도손한 마을 모습도 오래 볼 수 있을 테고요. 제 바람이 모두 이뤄질 수 있도록 마을에 필요한 일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성실하게 임할 참입니다."

[옥천읍 문정4리 김효순 이장] "20년간 섬세함으로 돌본 마을, 더 살기 좋은 마을"
 충북 옥천군 옥천읍 문정4리 김효순 이장.
ⓒ 월간 옥이네
낮은 주택가 사이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화단이 맞이하는 진달래아파트. 1996년 완공된 아파트라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쓰레기 없이 잘 관리된 이곳을 20년째 돌보는 이가 있다. 아파트 곳곳이 전부 추억의 장소라는, 문정4리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김효순 이장이다. 대전이 고향인 그가 옥천에 온 건 1990년대 말. 남편의 직장 발령으로 옥천에 오면서 진달래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리고 5년 뒤 46세의 젊은 이장이 됐다.

"갑자기 이장 자리가 공석이 됐는데 주민들이 저를 추천했어요. 옥천에 온 지, 아파트에 입주한 지 5년밖에 안 됐는데 이장이라니, 엄청나게 부담됐죠. 당시 아파트에 시끄러운 일이 있었는데 그것만 정리하고 그만둬야지 생각하고 시작한 게 지금까지 온 거예요."

오랜 이장 생활만큼 김효순 이장이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또 있으니, 바로 봉사활동이다. 20년 전에는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현 옥천군노인복지관), 이동봉사를 다니며 일주일 중 절반 이상을 봉사에 매진할 정도로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 모습을 본 주민들이 이장으로 추천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그다.

"배우는 걸 좋아해서 여성회관에서 발 마사지 수업을 받고 자격증을 땄어요. 이후에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으로 강사활동과 봉사를 병행했죠. 여기저기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좋게 보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바깥에서 하는 봉사, 우리 마을에서 더 적극적으로 해보자 생각했죠."

하지만 처음 하는 이장 일에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154세대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일. 경로당 개보수 공사같이 아파트에 필요한 일에 다른 의견을 가진 주민이 있으면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다른 아파트에 비해 세대수가 적다지만 모든 주민을 아우르기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김효순 이장에게 힘이 된 것이 여성이장 모임이다.

"그쯤 옥천읍 62개 마을 중 6명이 여성이장었어요. 예전에 비해 여성이장이 많아졌지만 이장협의회에 가면 남성 위주로 발언하고 진행되는 모습에 소외되는 것 같았어요. 다른 여성이장들도 비슷했는지 자연스레 모이게 됐고요. 게다가 다들 이장이 처음이어서 자주 만나서 마을에 어려운 일은 없는지 같이 고민하면서 의지를 많이 했죠."
 진달래 아파트 전경.
ⓒ 월간 옥이네
이장 임기 초반의 걱정과 불안 해결에는 어렸을 적부터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성격도 한몫했다. 서툴러도 계속 부딪히고 하나씩 해내다 보니 어느덧 베테랑 이장이 된 김효순 이장. 2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으니 마을의 숙원사업을 해결할 때라고 답한다.

"올해 노후화한 감시 카메라와 복도 창틀을 바꿨어요. 특히 감시 카메라는 총 54대로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큼 개수가 많아요. 예전엔 엘리베이터 내부에는 아예 없었고 지하 주차장에도 12대 정도만 설치돼 있었는데 조금씩 늘려서 지금은 아파트 입구, 옥상에도 카메라가 있어요. 안전 사각지대를 없애고 '문콕'같이 분쟁이 일어날 만한 일을 방지하려다 보니 많아졌어요. 가끔 불편한 상황으로 서로 마음 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싹 사라졌어요."

마을 주민을 위한 숙원 사업뿐 아니라 2006년 주민들과 함께 등화관제 훈련으로 받은 상금 500만 원으로 전 세대 소화기를 바꾼 일,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던 1997년부터 2010년까지 활발했던 부녀회 활동도 이장 생활에서 좋은 기억으로 손꼽히는 순간이다.

"어버이날, 노인잔치 등 마을 행사가 있으면 지금은 식당에서 하지만 예전에는 아파트 마당에서 했어요. 부녀회랑 같이 준비했는데 그 당시 인원만 30명이 넘었죠. 주차장에 테이블 빌려서 설치하고 솥단지 걸어서 행사 전날부터 밤새 끓인 육수에 국수 삶아서 같이 식사했어요. 힘들긴 했어도 같이하는 재미가 있었죠."

김효순 이장은 함께해서 즐거웠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게 아쉽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이해된다.

"지금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전부 사회생활을 하지만 그때는 아파트 주민 중 직장 다니는 여성이 많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래서 이장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요. 가정만 돌보는 일도 어려운데 일하면서 가정과 마을을 돌본다고 생각하면... 아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내 주변을 돌보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니까 예전만큼 할 수 없는 것도 이해가 돼요."
 옥천읍 문정4리의 모습.
ⓒ 월간 옥이네
이장을 내려두고 싶어도 할 사람이 없는 시기가 길어지는 게 걱정되지만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간다. 처음 이장이 된 그 순간을 기억하며 말이다.

"20년 이장을 했어도 배울 것이 많아요. 요즘은 스마트폰 어플로 공문 받고 마을 방송도 할 수 있거든요. 지난해 옥천읍이장협의회에서 진행한 이장학교에서 새로운 업무 처리 방식과 우리 마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공부할 수 있었어요. 배움에는 끝이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웃음).

처음 이장 시작할 때 여성이장이 6명이었는데 지금은 반으로 줄었어요. 아직 마을에는 남성이장이 익숙한 분위기가 더 큰 것 같아요. 여성이장이 선출돼도 오래 활동하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여성이 가지고 있는 섬세함으로 마을을 잘 이끌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지금껏 했던 것처럼 부지런히 공부해서 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겠습니다."

월간옥이네 통권 87호(2024년 9월호)
글 사진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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