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작업자‧컨베이어벨트 없앤 현대차의 생산혁명 '싱가포르혁신센터'
컨베이어벨트 없애고 유연생산 '셀 방식' 도입…생산직보다 연구직 많아
메타버스 공간에 동일 공장 조성…한국서 싱가포르 공장 설비 제어 가능
헨리 포드에서부터 시작된 ‘소품종 대량생산체제’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소비자들에게 맞춤형 자동차를 제공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의 전환은 산업 패러다임 전환기를 맞은 자동차 업체들이 직면한 큰 숙제 중 하나다.
근로자들이 줄지어 서서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움직이는 차체에 부품을 장착하는 단순화된 반복 작업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기존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리스크지만, 소비 트렌드 변화와 목적 지향적 가치체계의 중심이동에 대응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현대자동차그룹이 3년의 공사를 거쳐 21일 준공한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는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자 현대차그룹의 미래를 보여주는 테스트베드이기도 하다.
지난 16일, 준공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HMGICS를 찾았다. 싱가포르주롱혁신단지에 세워진 HMGICS는 한 눈에 봐도 일반적인 완성차 공장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앞뒤로 길쭉한 7층 건물에, 지붕에는 타원형의 자동차 주행 트랙까지 얹은 특이한 모습으로 기자단을 맞았다. 건물 자체만 놓고 보면 상당한 규모지만, 광활한 부지에 저층 생산설비가 넓게 펼쳐진 정규 완성차 공장에 비하면 단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HMGICS의 연면적은 9만㎡(약 2만7000평)으로, 현대차 울산공장(500만㎡)의 55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건물 안에 들어서도 생산시설의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는다. 로비는 현대모터스튜디오를 연상케 할 정도로 ‘고객맞이’에 특화된 단정한 모습이다. 심지어 로비의 상당부분을 자동화된 농작물 재배시설 ‘스마트팜’과, 방문 고객의 농작물 재배 체험 공간이 차지하고 있다.
“자율주행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되면 목적에 맞게 제품을 이용하고 싶은 소비자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조사도 새로운 시장에서 어떻게 사용자들의 니즈를 반영하면서 발전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데, 그 테스트베드의 용도로 HMGICS가 만들어졌습니다.”
정홍범 HMGICS 법인장(전무)은 이 범상치 않은 시설의 설립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건물 2층에 올라가서야 제조시설다운 면모를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프레스 기계가 철판을 쾅쾅 찍어대고, 로봇 팔이 용접봉을 태우며, 컨베이어벨트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분주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창고형 마트와 연구시설을 결합한 형태에 가까웠다.
2층 부품 창고에는 부품들이 차곡차곡 정리된 거대한 선반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여기서 생산 수요에 따라 수평 셔틀을 타고 레일을 따라 움직이며 분류된 부품들은 수직 셔틀에 실려 생산설비가 들어선 3층으로 이송된다. 작업자는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모든 과정이 자동화돼있다.
3층으로 올라온 부품들은 자율주행로봇(AMR)들이 돌아다니며 실어 나른다. AMR에는 라이다(Lidar)와 센서가 달려있어 사람은 물론 장애물까지 실시간으로 피한다. 실제, 움직이는 AMR 앞을 가로막으니 멈춰 섰다가 다른 경로로 이동했다. AMR의 초당 최대속도는 1.8m로, 실내에서 움직이는 자동화 물류 장치로서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가정용 로봇 청소기처럼 배터리 용량이 20% 미만으로 줄면 알아서 충전기로 이동한다고 한다.
HMGICS 전체는 5세대 이동통신(5G)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 2층 부품 창고에선 5G 네트워크를 통해 받은 정보로 AI가 재고를 실시간 관리한다. 예를 들어 조립 과정에서 부품이 부족하면 AI가 로봇을 시켜 3층 생산 시설까지 필요한 부품을 올려 보낸다. 로봇 관제 시스템에도 5G가 적용돼 있다. 무려 200대의 로봇이 작업장에서 움직이지만, 5G로 제어해 충돌 위험은 없다.
컨베이어벨트 대신 '셀'…다품종 주문제작 대응 최적화
AMR의 최종 종착지는 ‘셀(Cell)’이라는 이름이 붙은 타원형의 소규모 작업장이다. 컨베이어벨트를 대체하는 HMGICS 제조설비의 핵심이 바로 셀이다. 수십, 수백명의 작업자가 공정 단계마다 서 있는 컨베이어벨트와 달리, 셀에는 단 한 명의 작업자가 들어가 있을 뿐이다. 이 작업자가 여러 대의 로봇과 협업하며 자동차의 조립을 책임진다.
기존 완성차 공장에서는 도장이나 조립, 프레스 등 개별 공정을 맡는 근로자가 따로 있지만, HMGIC에선 이런 공정의 상당수를 로봇이 맡는다. 특히 시트나 유리‧타이어 등 무거운 부품을 들어 옮기고 조립하는 일은 로봇의 몫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주로 생산 현황을 파악해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HMGICS에는 현재 27개의 셀이 만들어져 있다. 이들 중 전기차와 로보택시 등 다양한 차종에 대응 가능한 최종 조립단계를 담당하는 유연셀은 6개가 운영된다. 유연셀 기준 셀당 연간 생산대수는 5000대다. 공장 전체로 연간 3만대의 생산이 가능하다. 내부 여유공간을 활용하면 유연셀은 12개까지 확대할 수 있다고 한다.
일정수준 조립된 차체는 무인운반차량(AGV)이 옮긴다. 넓고 납작한 몸체 위에 차체를 올려 바닥에 있는 QR코드를 읽으면서 셀과 셀 사이를 이동하는 방식이다. 컨베이어벨트의 역할을 로봇이 대신하는 셈이다.
연속적으로 작업이 이뤄지는 컨베이어벨트의 효율적 구조를 포기한 대가로 셀 방식은 상당히 복잡한 물류 동선을 강요당한다. 로보틱스 기술을 고도화해 자동화율을 극대화한다고 해도 생산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지만,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감안하면 결국은 모두가 가야 할 길이라고 현대차는 확신한다. 고객의 다양한 취향에 대응하는 다품종 주문제작(커스터마이징) 제품을 만드는 제조혁신은 피할 수 없는 미래고, 동일한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던 시대의 생산속도를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를 남들보다 먼저 걷는 게 HMGIC의 역할이다.
정홍범 법인장은 “자율주행차가 보편화되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운전을 하지 않고, 공간을 소비하게 된다. 공간 상품으로 변하게 되면 고객 취향에 따라 다양한 커스터마이징이 필요하고, B2C(기업 대 소비자)의 개념으로 본다면 ‘하이퍼 커스터마이즈’된 상품이 만들어져야 한다”면서 “지금의 컨베이어벨트 방식으로 그런 커스터마이징을 할 수 있겠는가. 다양한 폼팩터와 다양한 커스터마이징을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하는 부분들을 HMGICS가 생각하고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류, 조립, 검수까지 모두 로봇이…자동화율 100% 목표
생산라인에서는 낯익은 얼굴(?)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현대차그룹 계열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의 4족 보행 로봇 ‘스팟(Spot)’이다. ‘로봇 개’라는 별명에 걸맞게 스팟의 역할은 ‘감시견’이다. 공정 곳곳에 배치돼 차체 주변을 돌면서 머리에 달린 카메라로 조립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문제가 발견되면 ‘왈왈’ 하고 짖기라도 힐 기세다.
HMGICS에서 스팟에게 주어진 직함은 ‘AI 키퍼’다. 원래 완성차 공장에서 조립 상태 확인을 담당하는 품질 검사원을 ‘키퍼’로 부르는데, 스팟은 AI 기술을 접목해 사람 대신 품질 검사 업무를 맡는다는 점에서 이런 직함을 받았다. 스팟은 카메라로 조립 상태를 촬영한 영상을 AI 알고리즘으로 분석해 품질을 확인한다. AI 기반이기 때문에 불량품 판별 속도와 정확도는 그만큼 높아진다고 한다.
다양한 로봇들의 역할로 인해 HMGIC의 자동화율은 물류 65%, 조립 46%에 달한다. 현재로서는 사람이 하기 힘든 일, 이를테면 크고 무거운 부품을 운반‧조립하거나 작업 자세가 신체에 부담이 되는 부분을 위주로 자동화돼있지만, 앞으로 모든 작업의 100% 자동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높은 자동화율 덕에 생산설비 전체를 통틀어 작업 인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현재 270명 가량의 HMGICS 중 생산직은 100여명에 불과하고, 절반 이상은 연구개발 인력이다. 특히 디지털 분야에만 70여명의 엔지니어가 배치돼 있다.
높은 연구인력 비율은 HMGICS의 역할이 ‘테스트베드’임을 실감케 해주는 숫자다. 당장의 실적이 아닌 혁신의 과정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을 현대차가 해외 곳곳에 설립할 미래 공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HMGICS의 역할이다.
실제 자동화 공정에 투입되는 각종 로봇들도 계속해서 개선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HMGICS 내 연구시설에서는 로봇 팔로 차량에 장착되는 각종 케이블을 집어서 옮기는 테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은 사람이 수동으로 분류하는 게 더 빠르지만, 앞으로는 로봇이 대체할 수 있도록 케이블을 분류하고 잡아 올리는 최적의 위치와 동작을 수행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했다.
생산에서 고객경험, 연구개발, 테스트까지 한곳에서
현대차그룹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미래 공장은 단순히 생산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고객 경험(CX), 연구개발(R&D), 테스트까지 모든 과정이 한 곳에서 이뤄지는 종합적인 공간이다.
HMGICS 인근에는 고가 다리를 건설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싱가포르 도시철도(MRT)의 새로운 노선을 만드는 공사로, HMGICS와 바로 연결되는 역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소비자들은 우리나라의 지하철에 해당하는 MRT를 타고 HMGICS를 방문해 로비에서 문화 시설을 즐기거나 자동차 관련 전시물, 심지어 생산 과정을 살펴볼 수도 있다.
차량 구매자는 스마트폰으로 자동차를 주문하고 건물 내에서 가상현실(VR) 투어를 통해 자동차 조립 과정을 경험한 뒤 건물 옥상에 있는 주행시험장 ‘스카이 트랙’으로 올라가 자신이 주문한 차량을 시승해본 다음 차를 인도받을 수 있다.
총 620m길이의 스카이 트랙에는 직선 코스, 최대 기울기 33.5도의 코너링 코스가 갖춰져 있다. 전문 드라이버가 모는 아이오닉 5를 타고 트랙을 몇 바퀴 돌아보니 속도감이 상당하다. 안전 문제로 최고 시속 80km/h로 제한해 놨다고 하는데, 건물 옥상에서 그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이 트랙은 고객 시승 외에 이곳에서 개발된 차량을 테스트하는 용도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HMGICS가 도심 인근의 한정된 부지에 옥상에 트랙까지 갖춘 7층 건물로 지어진 것도 이같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HMGICS 운영 경험 메타 팩토리에 반영…스피디한 해외 공장 설립 가능
현대차그룹에게 있어 물리적 HMGICS 시설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메타버스 HMGICS’다. 애초에 현대차그룹은 혁신센터를 ‘디지털 트윈’ 개념으로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에 동일하게 만들고, 이를 활용해 전세계에 동일한 공장들을 세운다는 계획 하에 HMGICS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HMGICS의 건물, 설비, 생산 시스템 등 실제 현장은 메타버스에도 그대로 지어져 있다. 현대차그룹에서는 이를 ‘메타 팩토리’라 부른다. 메타 팩토리는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있는 직원이 메타 팩토리를 통해 싱가포르에 있는 공장 설비를 제어할 수 있고, 문제 발생시 대응도 가능하다. 로봇은 디지털 공간에 있는 쌍둥이 공장을 참고해 실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신차 투입이나 프로세스 변경 등의 이슈에도 빠르게 대응 가능하다. 정홍범 법인장은 “디지털 트윈이 완성되면 피지컬 팩토리(물리적 공장)에서 정규 생산을 멈추고 시행착오와 검증 과정을 거치느라 시간적, 비용적 손실을 감수할 필요 없이 메타 팩토리에서 사전에 테스트하고 피지컬 팩토리에서 바로 생산에 투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HMGICS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작업들은 메타 팩토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업그레이드된 메타 팩토리는 현대차그룹이 해외에 새로운 생산공장을 빠르게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쉽게 말해 ‘Ctrl+C, Ctrl+V’ 식으로 공장을 지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향후 HMGMA(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와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한국 울산 EV 전용공장 등 글로벌 전기차 신공장에 HMGICS에서 개발, 실증한 제조 플랫폼을 단계적으로 도입할 예정이다.
물리적 공장과 메타 팩토리를 동기화시키는 작업은 아직 진행 중이다. 정 법인장은 “피지컬 팩토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뮬레이션화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시뮬레이션 팩토리를 피지컬 팩터리에 반영하는 건 아직 안 돼 있다”면서 “동기화 프로세스를 진행 중으로, 현재 데이터 분석 단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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