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비운의 기아 자동차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실패는 한 편으로는 중요한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을 토대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여 결국 성공에 이르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 세계에서도 수많은 실패사례들이 존재했고, 그러한 실패, 혹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도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일원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자동차 기업인 기아 또한 예외가 아니다. 특히 기아는 사업 초창기부터 현대자동차보다도 더욱 다이나믹한 부침을 겪어 온 회사였다. 특히 1980년대에는 신군부 정권의 폭거로 인해 승용차 생산을 금지 당했다가 1980년대 후반에나 풀렸고, 겨우 승용차 라인업을 꾸렸더니 1997년 외환위기 가 들이닥치는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풍파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현대차에 인수되기 전에는 상당히 기술력을 중시하는 사풍(社風)으로 인해 상당히 특색있는 자동차들을 만들어 왔지만, 시장의 반응이 항상 좋았던 것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 사례들을 하나 둘씩 딛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기에 기아는 오늘의 위치에 이를 수 있었다.
푸조 604(1979)
기아가 아직 기아산업이었던 시절인 1970년대는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고급 승용차 시장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1978년 상공부의 6기통 자동차 생산 제한 조치가 해제되고 노후화된 관용차량 교체수요가 발생하면서 고급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당시 마쓰다 계열의 소형차종으로 라인업을 꾸리고 있었던 기아는 이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자동차의 본고장, 유럽의 고급세단을 면허생산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렇게 국내에 출시한 차가 바로 푸조 604다.
푸조 604는 푸조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었던 601 이래 처음으로 새로 개발한 대형 고급 승용차로, BMW, 메르세데스-벤츠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된 모델이었다. '피닌파리나(Pininfarina)'가 빚은 우아한 스타일링과 정통 고급 세단의 정석인 후륜구동계, 그리고 고급 세단에 걸맞은 성능과 편의장비를 가졌다. 하지만 이렇게 야심차게 출시한 기아자동차의 첫 고급 승용차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먼저 차량의 가격이 문제였다. 1979년 당시 기준으로 푸조 604의 가격은 2,300만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비싼 가격이었다. 여기에 1978년 들이닥친 석유파동으로 인해 장관급 관용차를 4기통으로 제한하면서 그나마 있었던 수요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타우너(1992)
舊 아시아자동차(現 기아 광주공장)를 통해 출시한 이 경상용차 모델은 1991년 등장해 소상공인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었던 대우국민차(現 한국지엠 창원공장)의 다마스/라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차는 일본서 혼다, 스즈키 등과 함께 일본 경차 시장을 삼분하고 있는 토요타 계열의 다이하츠공업에서 만들어지는 하이제트(Hi-Jet)의 7세대 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다이하쓰 하이제트는 다마스와 라보의 원형인 스즈키 에브리(밴)와 캐리(트럭)의 경쟁 모델이기도 하다.
아시아자동차는 원형인 하이제트에는 없었던 일체형 헤드램프와 전면부의 별도 점검구를 마련하는 등, 타우너의 외관 디자인에 자사만의 디테일을 반영하고 수동식 선루프와 알로이 휠, 그리고 타코미터(회전계)를 적용하는 등, 상품성을 크게 끌어 올렸다. 아시아자동차는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우 故 최진실氏를 CF모델로 기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타우너는 1992년 출시 한 달 만에 다마스를 제치고 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우너는 생산 기간 내내 '다마스의 아류작'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품질 문제로 인해 출시 이후 지속적으로 평가가 하락했다. 2002년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여 콤비, 코스모스 등과 함께 단종을 맞았다.
아벨라(1994)
포드-마쓰다-기아 3사의 월드카 개념으로 만들어진 프라이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가운데, 이 성공을 이어 갈 후속 프로젝트로서 개발된 차가 바로 아벨라(Avella)였다. 이 차는 당대의 트렌드를 반영해, 곡선 위주의 스타일링을 가졌으며, 프라이드가 그러하였듯이, 해치백 모델로 먼저 선보였다. 그런데 아벨라는 국내시장 한정으로 데뷔 때부터 프라이드의 후속이 아닌, 준중형차인 세피아와 소형차 프라이드의 사이에 위치하는 애매한 포지션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기존에 생산하고 있었던 프라이드의 판매량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매한 포지션과 더불어, 아벨라는 출시 초기부터, 기존 프라이드에서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던 품질 문제와 더불어, 프라이드 대비 차체는 훨씬 크고 무거워졌음에도, 파워트레인은 기존 프라이드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바람에 동력성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물론 기아자동차는 세피아에 사용했던 엔진까지 끌어오면서 동력성능 보완에 나섰지만, 당시 소형차들은 1.3리터급 엔진이 주류였기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후에 델타(Delta)라는 이름의 세단형도 추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벨라는 프라이드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 채, 1999년, 신차 리오의 등장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엔터프라이즈(1997)
이 차는 실패작이라기 보다는 비운의 차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 차는 푸조 604 이래 이렇다 할 플래그십 대형세단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기아가 절치부심으로 준비한 모델이었다. 마쓰다의 고급 세단, 센티아(Sentia)의 2세대 모델을 바탕으로 개발된 이 차는 당시 국내 고급세단의 취향을 반영해 극도로 보수적인 스타일로 얼굴을 가졌고, 당시 국산 세단 최초로 5미터를 넘는 차체길이, 그리고 강력한 성능의 3.2리터 V6 엔진과 후륜구동 시스템, 그리고 당대 최신을 달리는 첨단 안전사양을 대폭 적용하는 등, '정통파 고급세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기아가 이 차를 출시한 시기는 1997년. 그렇다. 이른 바 "6.25 이래 최대의 국난"으로 꼽히는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에 태어난 것이 문제였다. 이 때 벌어진 국내 대기업들의 연쇄도산에 기아자동차의 모기업인 기아그룹까지 휘말리며 부도가 났던 상황으로, 대형 고급세단인 엔터프라이즈에게 치명적인 이미지 손상을 입히고 말았던 것. 심지어 같은 해에는 '벤츠 기술'을 등에 업은 쌍용자동차 체어맨이 나타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신차효과를 거의 보지 못했으며, 1999년에는 '초대형세단'을 표방한 현대 에쿠스까지 등장하면서 엔터프라이즈는 존재감을 잃었다. 기아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최고급세단 엔터프라이즈는 2002년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단종을 맞았다.
세피아 II & 스펙트라(1997, 2000)
기아가 1992년 출시한 세피아(SEPHIA)는 기아 준중형 승용 모델 가운데 거의 유일한 성공작으로 평가 받는다. 그렇다면 가장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던 차를 꼽는다면, 초대 세피아의 후계차종으로 등장한 세피아 II를 꼽을 수 있다. 이 차는 1997년 하반기, 외환위기 직전에 출시된 차종으로, 기존 세피아의 기반설계는 그대로 둔 채 외관과 인테리어만 변경해서 만들어진 '스킨 체인지' 모델이다.
이 차가 시장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차는 기본적으로 이미 낡은 설계인 세피아의 것을 이렇다 할 변경 사항 없이 그대로 재활용한 데다, 더 큰 차체를 얹은 것도 모자라서 상품성을 위한 편의장치는 늘어난 데 반해, 파워트레인의 성능 개선도 없어, 초대 세피아의 경쾌한 주행성능마저 잃어버렸다. 여기에 당시 돌풍을 일으킨 대우자동차의 누비라와 현대자동차 아반떼가 큰 인기를 끌면서 신차효과를 볼 여유도 없었다. 기아는 현대자동차 합병 이후 이 차의 마이너 체인지 모델인 '스펙트라'를 내놓기는 했지만, 이미 구식화된 설계에 품질 문제까지 겹치면서 세 번에 걸친 페이스리프트에도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