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선과 가상자산]①'선거실세' 된 가상자산…4년 규제에 칼 갈아
정치후원금 1위가 리플…신생업계 이례적 행보
美SEC와의 법적 분쟁 …규제 불확실성 비판
"Vote for #Bitcoin(비트코인을 위해 투표하라)"
가상자산업계의 '큰손' 마이크로스트래티지의 마이클 세일러 회장이 지난 11일(현지시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를 통해 공유한 문구다. 세일러 회장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트코인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업계 큰손'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간 가상자산 정책 기조 차이가 극명한 만큼 크립토 옹호론자들은 업계와 투자자를 막론하고 공개적으로 투표를 독려하며 유권자들에게 정치적 구애에 나섰다.
15일 가상자산업계에 따르면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는 가상자산업계의 규제·산업 판도를 바꿀 대형 이벤트가 될 전망이다. 내주 예정된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와 더불어 하반기 최대 가상자산업계 이슈로 꼽힌다.
지난달 미국 소비자 단체 '퍼블릭 시티즌' 등에 따르면 올해 미국 대선에 직접 후원 형태로 투입된 가상자산 업계 정치후원금은 1억1900만달러에 달한다. 이는 기업들의 전체 기부금 2억4800만달러의 약 48%를 차지한다. 가상자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 개별 재단인 리플이 기부금 82%가량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어쉐이크(Fairshake)라는 가상화폐 및 블록체인 분야 슈퍼PAC(정치후원회)에 기부했는데, 이는 정당과 후보를 가리지 않고 '가상자산 옹호' 후보에게 자금을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생 산업계가 미국 대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건 이례적이다. 이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대한 가상자산업계의 불신과 불만 때문이다. 게리 겐슬러 위원장을 필두로 미국 SEC는 지난 4년간 바이든 정부하에서 가상자산업계와 소송전을 벌이며 '강경 규제' 기조를 유지해왔다. 바이든 정부 역시 초크포인트(Operation Choke Point·미국 정부가 은행 등 금융회사 검열을 통해 가상자산 산업을 억제하는 방식) 규제를 통해 우회적으로 이런 기조를 뒷받침해왔다. 미 SEC가 올해 1월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상장 승인을 낸 것 역시 법정 다툼에서 패소한 후에나 이뤄졌다. 홍성욱 NH투자증권 연구원도 "기업 입장에선 (해당 비용을) 투자에 활용할 수도 있고 영업활동에 쓸 수도 있는데 이를 대선에 투자한다는 것은 선거 결과에 따라 기업 전망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후원금 최상위 명단에 오른 코인베이스와 리플은 미국 SEC와 장기간 법적 소송을 벌인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리플의 경우 2020년 12월 피소 이후 2024년 7월 최종 법원 승소까지 3년 7개월이 소요됐다. 지난달 7일(현지시간) 아날리사 토레스 뉴욕남부지방법원 판사는 SEC가 요구한 과징금 및 민사상 벌금 20억달러가 아닌 1억2500만달러(약 1720억원)의 과징금만 부과하는 것으로 판결을 내렸다. 이는 당초 SEC가 제시한 금액에서 94% 줄어든 금액이다. 토레스 판사는 일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XRP 판매는 연방 증권법 위반이 아니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기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XRP 판매는 증권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봤다. 이는 '증권성'이 곧 '상황' 자체이기 때문이다. 증권법상 금전적 투자와 사업 이행, 투자자들의 수익 기대 등 투자계약 증권상 요건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따라 판결이 나뉜 것이다.
가상자산업계의 적의가 향하는 주된 대상은 가상자산 규제를 주도하는 겐슬러 위원장이다. 브래드 갈링하우스 리플 CEO(최고경영자)는 지난 3일 한국 기자간담회에서 겐슬러 위원장을 향해 "미국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 후보가 당선돼도 겐슬러 위원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다는 데에 돈을 걸겠다"며 날 선 입장을 보였다. 그러면서 "민주당 고위 임원들도 SEC가 가상자산업계와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정석문 프레스토 리서치센터장은 "신생 산업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규제 불확실성 해소가 필요하다"며 "SEC는 가상자산업계를 자기네 관할로 보지만, 업계는 이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새로운 디지털자산 전문법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 의견"이라고 꼬집었다. 장경필 쟁글 리서치센터장 역시 "SEC가 증권이면 증권이라고 얘기해주면 맞출 텐데 그것도 아니고 소송만 자꾸 휘말리는 상황"이라며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고 짚었다.
다만 가상자산업계의 과감한 정치적 행보에 대한 사회적 우려도 나온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막대한 정치후원금이 캠페인에 흘러 들어가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가상자산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며 "가상자산이 기존 화폐를 대체하겠다는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를 왜곡하는 강력한 힘이 됐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가상자산에 대해 '경제적 효용이 없다'며 꾸준히 비판적 견해를 유지해 온 반대론자이기도 하다.
한편, 가상자산 업계는 자체 여론조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영향력도 과시하고 있다. 제미니가 지난 10일(현지시간) 내놓은 '글로벌 가상자산 현황'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상자산을 보유한 미국인의 73%는 "가상자산에 대한 대선 후보의 입장이 투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했다. 그레이스케일 역시 자체 설문조사를 통해 "투표자의 절반 이상(47%)이 포트폴리오에 가상자산을 담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작년 40%보다 7%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차민영 기자 bloo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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