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내가 암 투병 중이오"…그때 의사가 날린 돌직구
■ 오늘의 '더중앙플러스' - 최철주의 독거노남
「 나이 80세에 견디기 힘든 위암 수술.
아내라도 있으면 좀 낫겠건만,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독거노인.
혼자 남은 남자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인가 싶겠죠. 14년차 독거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뜻밖의 장면들을 찾아낼 겁니다. 왜 무심코 세월을 흘려보냈나, 하는 반성과 저런 인생도 괜찮구나 하고 노학자의 인생을 격려하리라 생각합니다.
혼자여서 얻은 자유, 지금 이대로가 좋은 여든 살의 삶. '최철주의 독거노남'(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29) 이야기입니다.
」
2017년 6월의 세 번째 월요일 저녁.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하 존칭 생략)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도착한 J박사와 이야기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어두웠다. 이어령은 한 달 전 서울 평창동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은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만한 좋은 의사 없을까요. 내가 암 투병 중이오.”
신문사 퇴직 후 이곳저곳에서 웰다잉 강의를 하러 다니던 중 나는 그가 앓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이어령은 딸 이민아 목사가 몹시 아팠을 때인 2011년 7월에도 저녁식사에 나를 초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어령은 암 치료를 둘러싼 궁금증을 풀어 줄 의사의 조언을 간절히 희망했다.
2017년 내가 이어령에게 처음 추천했던 J는 웰다잉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독특한 의료인이었다. 미국에서 25년 동안 암 연구와 치료에 전념해 왔고,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일하며 지켜온 명의라는 이름값 때문에 J의 항암 치료를 받으려면 2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그는 의사이면서 토속적이고도 철학적인 화두를 자주 던지는 말재주꾼이라 이어령의 시선에 딱 꽂히기 좋은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말기 환자 가족이 그에게 “최선을 다해 주세요. 모든 것을 다 맡기겠습니다”라고 하소연하면 “아니요. 그렇게 맡기면 나중에 찾아갈 게 없어요. 나도 별로 할 게 없고요”라고 답변했다. 어차피 말기 단계에서는 환자 스스로가 웰다잉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을 넌지시 던지곤 했다.
J는 말기 암 치료의 최종 단계에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사를 강조해 온 흔치 않은 의사였다. 나는 이어령에게 그의 평소 생각을 미리 설명해 두었다. 식사가 시작되면서 이어령은 자신의 여러 가지 증상과 검사 중 겪는 고통, 갖가지 상념을 소상하게 나열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할 일이 참 많아요. 지금 20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책도 여러 권 써야 하고 방송 프로그램도 있고….”
유창하던 그의 말이 여기서 그쳤다. 한참 후에 그는 “이게 그동안 내가 병원에서 받았던 검사 자료와 의무기록 사본”이라고 말하며 가지고 온 봉투 속에서 서류를 꺼내 J 앞으로 내밀었다.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흐르면서 저녁식사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J는 서류를 넘길 때마다 이어령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한참 후 아무런 수식어도 붙이지 않은 채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말했다.
“장관님, 암을 이대로 놔두시면 어떻습니까. 그냥 이대로 사시면서요. 나는 암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일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3년 사시게 되면 3년치 일하시고, 5년 사시게 되면 5년치 일만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게 치료 방법입니다.”
나는 J가 그토록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J의 권고안은 오래전 그의 딸이 선택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어령은 “허, 참” 하고 가볍게 웃어넘겼다. 세상에 가장 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내는 언어마술사 이어령에게 J는 가장 짧고 쉬운 문장으로 설명했다. 나는 참으로 잘 조화된 질문과 답변이라 생각했다. 이어령의 긴 질문은 서류 속에 있었고, J의 답변은 인생을 다 산 할아버지의 농축된 식견처럼 표출됐다.
이어령은 한식 요리를 먹으면 마지막에는 하얀 밥에 나물 조금, 그 위에 고추장 한 숟가락 듬뿍 넣고 참기름까지 주룩 흘려넣어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그만의 식사법이 있었다. 침묵의 식사시간을 메우려는 듯한 이어령의 재빠른 즉석요리 솜씨를 J는 재미있다는 듯 쳐다봤다.
이어령은 그때 어떤 암환자 이야기를 꺼냈다. 가장이 중병에 시달리면 가족들의 속내도 복잡하게 얽힌다는 것이었다. 환자를 둘러싼 세상의 단면을 우스갯소리로 풀어내자 우리 셋이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한참 후 J가 자신의 소견을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는 환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살기 위해 치료받을 것인가, 치료받기 위해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고요. 환자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 다릅니다.”
이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요”가 유일한 코멘트였다. 언제나 긴 문장이었던 그의 말솜씨에 변화가 생긴 것을 나는 주목했다. 그의 눈 가장자리가 젖어 있었다. 헤어질 때 그가 내민 손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 또 다른 노학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 ▶ “집에서 죽자” 난 오늘 결심했다…웰다잉 강사의 고독사 준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07869
▶ “난 살기죽기 아닌 죽기살기”…이어령과 딸, 죽음은 닮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44257
▶ 김일성과 충격의 아침 밥상…청년 김형석 “아, 이게 공산당”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0147
▶ 이젠 104세가 된 철학자 “촛불은 혁명이 아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1250
▶ “난 목사 안된 게 참 다행” 김형석이 피한 ‘뱀의 꼬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8351
」
■ 『고독사를 준비 중입니다』(최철주 지음, 중앙북스)
「
중앙방송 대표와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 최철주는 은퇴 후 20년 동안 웰다잉 강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아내와 딸을 병마로 먼저 보낸 자칭 ‘독거노인’이다. 세상 모든 이슈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기자였지만, 혼자가 되고 나서 배우고 깨달은 것도 많다. 혼자서 요리하는 법, 고독한 삶을 즐기는 법. 그리고 인생 최후로 행사할 '자기 결정권'에 대한 준비.
그가 더중플에 연재한 '최철주의 독거노남'을 새롭게 구성해 책으로 엮었다. 노인이라면 대개 꺼릴 만한 말을 담담하게 책 제목으로 걸었다. 『고독사를 준비 중입니다』(최철주 지음, 중앙북스). 지난 6월 말에 나온 책은 독자들의 호응 속에 두 달여 만에 2쇄를 찍었다.
」
최철주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c_projec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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