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학번이냐고요? 대학 나온 사람만 보십시오 [이봉렬 in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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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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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 입사 후 연수 받을 때 찍은 사진이에요. 정확히 34년 됐네요. |
| ⓒ 이봉렬 |
대학 대신 삼성으로, 그러나
회사에 갔더니 학력에 따라 신입사원들의 등급이 다르더라고요. 고졸은 5급, 전문대졸은 4급, 대졸은 3급. 회사 설명에 따르면 고졸이더라도 2년 일하고 성과가 좋으면 4급으로 또 3급으로 진급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선배들 보니까 안 그랬어요. 2년이 아니라 3년 혹은 4년이 걸려 진급하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물론 고졸자가 몇 해 경력을 쌓아 3급이 되어 막 입사한 대졸사원과 같은 직급이 되어도 이후 맡게 되는 일이나 진급의 속도는 또 달랐지요.
인사고과 잘 받아 4급이 되는 것 보단 전문대 졸업장을 따는 게 빠를 것 같아서 회사 다니면서 야간전문대를 다녔어요. 반도체 공장은 교대근무이기 때문에 아침 조로 일을 하면 저녁에는 가까운 학교 다니며 공부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전문대 졸업하면 다시 대학 편입해서 학사 학위도 받아서 3급 사원이 되겠다는 계획도 세웠어요. 당시 반도체 회사에는 5년만 일하면 병역을 면제해 주는 병역특례제도가 있었어요. 계획대로만 된다면 남들 대학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올 시간에 전 돈도 벌면서 경력도 쌓고 군대도 안 가는 최고의 시나리오였죠.
그런데 사는 게 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전문대 야간반을 다닐 때가 1991년이었는데 당시 노태우 정권의 폭정에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나섰고 그 과정에 대학생들이 경찰에 맞아 사망하고 또 분신하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몇몇 학생들이 함께 시위에 참여했는데 시민들에게 나눠 줄 유인물을 제가 작성했어요. 그 당시 전 회사 안에 있는 기숙사에 살 때였는데 경비실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제 가방 안에 있던 유인물이 발각되어 회사에서 바로 잘렸어요.
어떡해요. 남은 한 학기 아르바이트 해 가며 마치고 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표로 했던 편입 대신 군대로 갔죠. 군대 다녀와서는 다른 반도체 회사에 취직을 했고요. 그 후로 몇 회사를 더 거쳐 지금은 싱가포르까지 와서 반도체 회사 일을 하며 생활하고 있는 중이구요. 군대 갔다 온 기간을 빼더라도 반도체 생활만 30년 넘게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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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부터 입기 시작한 방진복을 지금도 입고 있어요. |
| ⓒ 이봉렬 |
세계적 반도체 기업에 취업한 비결
마이크론은 미국 회사인데 경력직 매니저를 뽑을 때 최소 학력을 정해 놨어요. 대졸자, 즉 학사 학위를 가진 사람만 매니저가 될 수 있어요. 경력직이 아니라 신입사원이 매니저로 진급을 할 때도 학위가 없으면 아무리 오래 일해도 매니저가 될 수 없어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두 번째 다녔던 회사도 미국 반도체 회사인 모토로라였는데 거기도 같았어요. 학위가 없으면 30년을 일해도 끝내 계장이 마지막이었거든요.
그런데 STM은 좀 달라요. 스위스에 본사를 둔 유럽 회사라 그런지 여기는 그런 제약이 없어요. 경력직을 뽑을 때 경력과 실무 능력을 위주로 보고 학력은 참고 자료 정도로만 이용해요. 신입사원이 매니저로 진급할 때도 학위가 필수요건은 아니고요. 그래서 저처럼 학위는 없지만 삼성전자, 모토로라 등 여러 반도체 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 매니저로 채용될 수 있었던 거예요.
얼마 전 기사로 쓰기도 했는데 반도체 회사가 최첨단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어요. 반도체 팹에서 일하는 오퍼레이터나 장비엔지니어의 경우는 고졸자나 전문대졸자들이 대부분이고 그 안에서 인원도 제일 많아요. 그러니 경력 있는 반도체 장비엔지니어의 경우는 학사 학위 없는 사람들이 더 많죠. 학사 학위가 채용의 필수 조건이 되는 순간 숙련된 기술의 인재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죠. 회사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 거예요. 그래서 마이크론도 저 같이 아까운 인재 하나 놓친 거예요.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요)
싱가포르에 살면서 가끔 모르는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꼭 이렇게 묻더라고요.
"몇 학번이세요?"
전 그럼 늘 77학번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네요)까지가 의무교육이었죠. 그러니 대부분 초등학교 입학은 했다 치고 그냥 그 해를 제 학번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제가 야간전문대학이라도 가야겠다고 맘먹고 입학했던 1990년의 한국 대학진학률이 얼마일 것 같아요? 한국교육개발원 자료를 보니까 33.2%였어요. 열 명 중 셋 정도만 대학에 갔다는 이야기고 넉넉히 잡아도 제 또래가 만나는 사람 둘 중 하나는 대학에 안 갔고, 학번 따윈 없다는 뜻이에요. 고등학생 수보다 대학 정원이 더 많다는 지금(2021년)도 대학 진학률은 73.7%에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물어요. 몇 학번이냐고. 전 이제 상처에 딱지까지 앉았다가 그 딱지 앉은 자국까지 사라진 상태지만 그런 질문이 상처가 되는 사람 아직 많아요. 그런 질문, 실례예요.
이런 질문, 이런 뉴스, 불편해요
말하는 것도 민망하고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는 이런 학벌 이야기를 떠올린 건 지난 15일 파리바게트 등 SPC그룹에 빵 재료를 납품하는 한 공장에서 23살 여성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는 뉴스를 보면서예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SPC그룹은 노동자 탄압으로 뉴스에 자주 나오는 기업인데 이젠 탄압을 넘어 인명사고까지 발생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수사와 책임자 처벌 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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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죽었어요. 그 노동자의 안타까운 사연 말고 그 공장자체의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해요. |
| ⓒ jtbc 보도 화면 |
앞서 말했듯이 대학 안 가는 사람 많아요. 그게 가정형편 때문일 수도 있고, 공부가 적성이 안 맞아서 일 수도 있고,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는 고졸자가 뉴스에 나오면 가정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에 못간 것으로 표현을 해요. 못간 게 아니라 안간 것일 수 있는 거잖아요.
이번 사건의 경우는 유가족이 말한 대로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못간 게 맞지만 그게 이번 사건의 본질은 아니잖아요. SPC그룹사에서 발생한 노동자 사망사고이고, 그건 그 피해자가 고졸 여성이건 대졸 관리자건 똑 같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평소 회사에서 안전관리를 얼마나 형편없이 했기에 이런 사고가 났는지를 밝혀야 할 기자들이 안타까운 사연이라는 걸로 사람들 눈길을 끌려고 하는 게 맘에 안 들어요. 대학 안가고 공장 갔다는 사실을 두고 안쓰러워하는 세상 풍조가 전 불편한 거예요.
공고 다녔고 졸업 전에 취직해서 지금까지 반도체 밥만 30년 넘게 먹으며 딸 둘 키워서 독립시켰고 지금까지 남들에게 욕먹을 짓 안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누가 "대학도 안 나왔어요? 그 때 가정형편이 어려웠나봐요? 어쩌면 좋아…"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얼마나 가소롭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 주저리주저리 했어요. "다들 대학 정도는 기본으로 나온 거 아냐?" 이런 식의 말, 글, 기사는 더 이상 안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21세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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