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융·건릉을 돌아 수원화성 행궁에서 정조의 마음을 읽다
[김병모 기자]
주말 여행이라 설렌다. 지인들과 함께 행복 동행이다. 평소에 가보고 싶은 여행지이기도 하다. 대전을 출발, 고속도로 첫 휴게소에서 임시 자리를 펴고 준비해온 아욱 올갱이 된장국에 흰 밥을 받아 들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호호 불며 먹는다. 귓불에 스치는 아침 바람을 느낀 채 먹는 맛이 일품이다. 여행의 절반은 눈을 호강시키는 것이고, 다른 절반은 입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행의 절반은 이 맛으로 이미 풍족하다. 나머지 눈 호강을 위해 여행을 출발한다.
지난 주말, 관광버스는 우리의 설렘을 싣고 수원 화성 융건릉으로 향했다. 관광버스가 목적지로 달릴수록 창밖엔 아침 햇살이 속삭이고, 차 안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자기소개가 이어진다. 자기소개가 끝나는가 싶더니 화성 융건릉 도착이란다.
기다렸다는 듯이 맛깔난 해설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정조는 1789년(재위 13년)에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왕세자의 신분에서 폐위되어 뒤 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思悼)의 아픔과 서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풍수상 명당자리를 물색한다.
고심 끝에 그는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는 묘를 현재의 화산(華山)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한다. 현륭원은 격을 높이기 위해 봉 분을 모란과 연꽃 모양으로 조각한 병풍석을 두른다. 이후 고종은 1899년(광무3년)에 현릉원을 다시 격을 높여 융륭(隆隆)이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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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화성 행궁 내 장락당. |
| ⓒ 김병모 |
화성행궁의 입구에 걸어 놓은 현판 신풍루(新豐樓)가 예사롭지 않다. 신풍루는 한 고조의 풍패지향(豐沛之鄕)에서 유래된 것이다. 정조 역시 수원 화성을 한 고조의 풍패와 같은 고향으로 삼고 노년을 즐기고자 신풍루라 편액(扁額)했다고 한다.
정조의 그와 같은 생각이 묻어 난 건물 중 하나가 바로 행궁 봉수당 뒤편 노래당(老來堂)이다. 늙어가는 것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인 정조는 노래당을 지어 노년을 대비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1800년)으로 노년을 즐겨보지도 못했다니 안타까움만 더한다.
정조대왕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산 정약용과 번암 채제공 등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 녹로나 거중기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2년 9개월 만에 완성하기도 한다. 수원 화성은 동서양의 군사 시설 이론이 잘 반영된 성곽으로 화홍문(華虹門)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더해 성곽의 꽃이라 불린다. 이러한 수원 화성의 우수성이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기도 한다.
특히 정조는 화성 축성 당시 기술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회식 자리에서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를 외쳤다고 한다. 요즘 회식 문화로 보면 다소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정조대왕의 백성에 대한 애민(愛民)의 마음이 엿보인다.
일행과 함께한 수원 화성 여행이 마무리될 무렵 대전으로 돌아서기 서러운 것은 팔달산 정상 수원 화성 서장대에 올라 정조대왕이 친히 장용영 군대를 지휘한 후 흡족하시어 어제화성장대시문(御製華城將臺詩文)을 친히 지어 서장대(西將臺, 당시 장용영 지휘 통제소) 처마에 걸어 놓은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 내내 아쉬웠지만, 일행들과 함께한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여행의 아쉬움이 때론 여행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머지않아 원형대로 복원된 정조대왕의 시문(詩文)을 보기 위해 수원 화성 서장대를 다시 찾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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