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과자 사는 일, 누구에겐 당연하지 않습니다

권현서 2024. 10. 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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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어린이 유튜버 '태윤이' 어머니 최윤겸씨 이야기

[권현서 기자]

"엄마, 거짓말 아니제? 내가 혼자 어떻게 고르노."

마트에 가서 사고 싶은 과자를 직접 담아보라는 엄마의 말에 10살 태윤이가 말했다. 태윤이는 선천적 시각장애를 가진 아나운서가 꿈인 어린이다.

지난 8월 태윤이와 태윤이 어머니 최윤겸(48)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태윤 유튜브'에는 태윤이가 점자로 된 상품명이 붙어있는 슈퍼에서 난생처음 스스로 과자를 골라 담는 영상이 올라왔다. 이 영상은 조회수 약 1만 회를 달성했고 많은 비장애인들이 점자의 필요성에 크게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오늘도 태윤이를 비롯한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점자와 함께 편리한 일상생활을 하길 바라며 힘쓰고 있는 태윤이 어머니 최윤겸씨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혼자 과자를 사다니, 정말 기뻐요"

"스스로 계산하고 과자를 사서 나오자 그제야 믿더라구요. 정말 너무 기뻐했습니다."

태윤이의 오랜 소원은 스스로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윤이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가 골라주는 과자를 먹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때 태윤이 어머니 최윤겸씨 눈에 태윤이의 '점자정보단말기'가 들어왔다. 점자정보단말기란 전자 점자와 음성을 통해 문서의 출력과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휴대용 정보통신 기기다.

100만 원이 훌쩍 넘는 점자정보단말기는 태윤이가 제 물건에 이름을 붙이거나 책 제목을 붙이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비싼 금액 탓에 쉽게 구매하기 어렵지만 태윤이가 사는 곳에서는 1년에 한 번 점자를 잘 읽는 아이들에게 자체 시험을 통해 70점을 넘기면 일부 구매 금액을 지원해 준다. 점자를 읽을 줄 아는 태윤이는 시험에 통과해 단말기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태윤이의 점자정보단말기와 최윤겸씨의 작업 흔적
ⓒ 최윤겸씨 제공
최윤겸씨는 태윤이의 점자정보단말기로 마트 사장님의 허락을 구해 상품에 점자로 표기된 라벨을 부착했다. 점자로 상품명 라벨링 작업을 하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라면 종류만 50가지 이상이고, 같은 과자여도 초코맛, 딸기맛이 있으며, 이름도 다 다르다. 작업을 위해 첫 일주일은 마트에서 파는 모든 품목의 이름을 촬영하고 기록했다. 다음 일주일은 점자 라벨지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직장인인 최윤겸씨는 퇴근 후 라벨링 작업에 매진했고 작업에만 3주가 걸렸다.
▲ 점자정보단말기로 라벨링 작업을 하는 최윤겸씨 ⓒ 최윤겸씨 제공
우여곡절과 최윤겸씨의 노고 끝에 태윤이는 처음으로 '스스로' 과자 쇼핑을 했다. 마트에서 제 손으로 과자 이름을 읽는 순간 태윤이는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연신 "이런 마트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계산을 마치고 과자를 사서 나오자 그제야 정말 스스로 과자를 샀다는 것을 믿었고 벅찬 감동을 보이며 기뻐했다.
 점자 라벨을 손 끝으로 읽고 있는 모습
ⓒ 최윤겸씨 제공
처음 점자 라벨이 붙어있는 마트에서 과자를 구매해 본 태윤이는 앞으로 모든 마트에 점자 상품명 라벨이 붙어있을 거라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런 태윤이에게 최윤겸씨는 '협조해 주신 마트에서만 특별히 작업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줬고 태윤이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는 모든 마트에 점자 라벨이 붙어있는 줄 알아요. 기뻐한 만큼 실망도 했답니다."
 친구와 함께 점자 라벨이 부착된 마트에서 라면을 고르는 태윤이
ⓒ 최윤겸씨 제공
'태윤 유튜브'에 올라온 태윤이의 '스스로 과자 장보기' 영상은 김해의 한 맹학교에까지 입소문을 타 맹학교의 여러 시각장애인 친구들도 함께 장을 보는 영상이 공개됐다. 태윤이의 시각장애인 친구들 역시 모든 마트에 점자 상품명 라벨이 붙어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 친구들에게도 최윤겸씨는 몇몇 마트에만 점자 라벨이 붙어있는 것이라고 또 한 번 설명해야 했다.

마트 사장에게 들은 충격적인 말

"점자 라벨링 작업 협조 요청을 하러 마트에 갔다가 눈물을 흘리고 나온 적도 있습니다. 차가운 반응이 충격적이었어요."

점자 라벨 부착에 협조해 줄 마트를 찾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최윤겸씨는 집 근처 다섯 군데의 마트를 돌며 협조를 요청했다. 물건을 일부러 많이 구매하며 사장님을 설득하기도 했지만 네 곳에서 줄줄이 거절당하자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A 마트 사장님으로부터는 충격적인 말도 들어야 했다. A씨는 시각장애가 있는 한 어르신이 마트에 방문했을 당시 입구에서 그 손님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무엇을 원하냐, 돈만 달라"하고 물건을 가져다 판 적이 있다며 "이렇게 다 해주면 되는데 왜 그런 작업을 하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최윤겸씨는 눈물을 흘리며 마트를 나왔다. 인터뷰에서 최윤겸씨는 시각장애인도 같은 사람인데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약국에서 스스로 '마데카솔'을 찾은 날 태윤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점자가 표기되어 있어도 정확한 제품명이 아니라 제품 분류가 적혀 있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태윤이는 '음료'라고 점자 표기된 캔 음료를 열고 예상치 못한 탄산 음료를 마신 적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약국에 방문했던 태윤이는 스스로 연고의 한 종류인 '마데카솔'을 찾고는 좋아하는 장난감이라도 찾은 것처럼 기뻐했다.

올해 7월부터 시행된 약사법 개정안에 따라 안전상비의약품에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및 음성·수어영상변환용 코드를 의무적으로 표시해야 한다(약사법 제59조2). 하지만 식품의 경우 지난해 6월 신설된 식품법 개정안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시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법률이 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강제성이 없어 여전히 점자로 제품명이 표기된 식품은 많지 않다(식품 등의 광고·표시에 관한 법률 제4조의 2). 식품법과 함께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시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화장품법 개정안은 지난 제21대 국회에서 가결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의약품
ⓒ Unsplash
그럼에도 인터뷰 중 안전상비의약품에 의무적으로 점자 표시가 될 예정이라는 말을 들은 최윤겸씨는 화색이 돌았다.

지금의 밝고 쾌활한 태윤이의 모습과 달리 어린 시절 태윤이는 많이 칭얼거리던 아이였다. 특수 맹학교 유치부 입학 후에도 적응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어린아이인데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축되고 고립되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며 최윤겸씨는 태윤이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장애가 결코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최윤겸씨가 떠올린 방법은 바로 세상에 태윤이를 보여주는 것, 유튜브 채널 운영이었다. 마침 태윤이는 어릴 적부터 아나운서를 꿈꿨고 최윤겸씨의 휴대전화에는 태윤이의 뉴스 영상이 가득했다. 최윤겸씨와 태윤이는 '태윤 유튜브'라는 채널을 만들어 태윤이의 뉴스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윤이는 밝고 당당한 어린이이자 3개월 차 아나운서 꿈나무 유튜버로 성장하고 있다.
 태윤이와 최윤겸씨가 운영하는 '태윤 유튜브' 채널
ⓒ '태윤 유튜브' 캡처
태윤이와 최윤겸씨의 목표는 시각장애인 어린이가 사는 모습을 보여줘 시각장애인들에게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최윤겸씨는 작은 목소리가 큰 울림이 되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표시가 늘어나고, 조금이라도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길 바란다고 전했다.
"위축돼 있던 태윤이가 당당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시작한 유튜브, 이제는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마트 장보기 이후 친구들과 밝게 인사를 나누는 태윤이
ⓒ 최윤겸씨 제공
우리나라에 등록된 시각장애인 수는 24만 8360명, 그중 20%에 해당하는 4만 5806명은 일상생활에 타인이나 보조기구가 필요한 1~3급 시각장애에 해당하는 중증 시각장애인이다(국가통계포털, 2023년 기준).

이들이 생활필수품을 구매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보행을 하기란 여전히 불편하다. 10월 15일 흰 지팡이의 날(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가 시각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지정한 날), 태윤이와 최윤겸씨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세상이 더 많은 이들에게 따뜻해지길,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행복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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