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이 환상적이라는데, 낮 풍광이 더 멋져요. 맑은 날 오세요. 짜릿함에 찔끔할지도 몰라요."
완도 사는 동생의 지엄한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밥 먹듯 일기예보를 살폈다. 햇살이 바삭한 10월 2일 완도타워에 올랐다. 차량으로 곧바로 갈 수도 모노레일을 탈 수도 있지만 걸어서 올랐다.
비행접시 닮은 완도타워는 다도해일출공원 높은 곳에 떠 있었다. 76m 높이에서 첫 소개팅에 나서는 아가씨처럼 반짝였다. 타워 옆 짚트랙 타는 곳에서 인디언 소리가 들렸다. 뒤로는 봉수대 돌담을 돌아 동망봉으로 가는 산책로가 이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간 이동을 했다. 하늘과 바다가 닿는 너머까지 파랬다. 투명한 햇살이 바다를 칼날처럼 내리쬐다가 튕겨 나갔다. 우유 거품 같은 구름도 흘렀다. 섬과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월출산이 가까웠고, 제주도가 아슴푸레했다. 더 둘러보러 가야 돼? 여기 있다가 돌아가도 되잖아. 뭉그적거리며 전복 한 마리가 통으로 들어간 '전복빵'과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 완도읍 바로 앞 노란 지붕은 모노레일이다. 멀리 신지대교 너머 청해진 유적인 장도가 보인다.
ⓒ 김재근
조선 말엽, 이조판서였던 이도재가 갑신정변(1884) 연루되어 고금도로 귀양을 왔다. 8년을 살다가 1894년(고종 31)에 풀려났다.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3대 지도자였던 김개남을 체포한 뒤 즉시 효수했다. 학부대신에 오른 그가 건의하여 1896년 완도군이 출생신고를 했다. 완도 사람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웠고, 적거지도 복원했다.
완도군(莞島郡)은 55개 유인도와 146개 무인도로 이루어졌다. 읍이 자리한 완도는 완도군의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이다. 해남군 남창을 연결하여 1969년 육지가 되었다. 강진에서 들어가는 길도 이어졌다. 마량에서 고금대교를 건너면 고금도이다. 장보고 대교를 건너면 신지도, 신지대교를 건너면 완도다. 약산도는 고금도와 이어졌다. 해남과 강진과 세 개의 섬을 이은 동그란 원이다. 중심이 강진만과 묘당도와 청해진이다.
배로 연결되는 나머지 섬들이 동그랗게 이들을 감싸고 있다. 노화도·보길도·소안도는 완도 화흥포항에서, 평일도·생일도는 약산도 당목항에서, 금당도는 장흥군 노력도에서 들어간다. 완도항은 손꼽히는 해태김 출하항이다. 제주도·청산도·추자도로 연락선이 오간다. 섬과 섬 사이에는 김과 전복 양식장이 들어섰다.
▲ 장도 청해진 유적이다.
ⓒ 김재근
청해진(淸海鎭)은 완도읍 장좌리 장도(將島)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유적(遺蹟)이다. 828년, 장보고는 군진(軍鎭)을 설치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당과 일본과 신라를 연결하는 삼각 무역을 독점하면서 해상왕국이라고 불릴 만큼 성세를 이루었다.
통일신라 왕위 계승 다툼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837년(희강왕 2)에 청해진으로 들어왔다. 장보고가 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44대 임금인 민애왕을 죽였다. 김우징은 45대 신무왕이 되었으나 석 달 만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이 문성왕에 올랐다.
장보고가 문성왕을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또 반란을 일으켰다. 문성왕 8년(846), 자객을 보내 장보고를 죽였다. 신라조정에서는 부하들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모두를 섬 밖으로 몰아냈다. 이후 500년간 무인도가 되었다. 후박나무·동백나무·비자나무 등이 울창하게 자랐다.
신지대교로 해양 휴양지 입지 굳힌 완도
장보고 기념관과 완도향교까지 돌고 나니 점심때다. 나 홀로 여행에서 밥 먹는 일이 난감할 때가 있다. 여행 안내서를 따라가 보면 1인분을 팔지 않는 곳이 의외로 많다. 추천을 부탁하면 대개가 한우고기나 생선회다. 집에서도 문밖에만 나가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그리 끌리지 않는다. 애써 백반집을 찾는다. 부담 가지 않는 비용으로 그 지역 특징 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어서다. 완도항 주변에는 괜찮은, 아침식사도 가능한 백반집이 많다.
▲ 구계등 파도에 밀린 돌이 층을 이룬다.
ⓒ 김재근
완도항에서 서쪽으로 4㎞ 정도. 정도리 구계등, 길이 800m, 폭 200m의 갯돌해변이다. 파도에 구르는 돌을 보며 '물멍'하는 바닷가다. 급한 경사를 따라 달걀만 하고 수박만 한 동글동글한 돌들이 파도에 밀려 아홉 개의 계단을 이룬 듯하다고 하여 구계등이다. 해변 뒤쪽에는 해송을 비롯하여 감탕나무·가시나무·태산목 등이 해안선을 따라 늘어섰다.
말간 햇살 탓인가, 바다 내음이 없다. 수박만 한 돌에 앉았다. 따스한 기운이 등을 타고 오른다. 바람이 귓불을 건드리고 지난다. 아이 셋이 엄마 따라 소풍을 나왔나 보다. 돌 구르는 소리 아이 웃음소리가 통통 튄다.
구계등에서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화흥포항이, 드라마 <해신> 세트장이, 난대림 수목원을 만난다. 되돌아 나왔다. 쪽빛 바다와 어울린 드넓은 모래 섬으로 가기 위해서다. 완도항에서 청해진 유적지를 향해 가다 보면 왼쪽으로 '신지도' 가는 다리가 나온다. 신지대교다. 완도군은 2005년 말 완공된 이 다리로 인해 해양 휴양지로 입지를 굳혔다.
▲ 명사십리 해수욕장 마스코트인 스머프가 바람을 벗삼아 홀로 해수욕장을 지킨다.
ⓒ 김재근
'명사십리(明沙十里)'란 이름을 갖고 있는 해수욕장이 많다. '밝은 모래'라는 뜻의 '명사(明沙)'다. 신지도는 '모래가 운다'는 뜻의 울 '명'(鳴) 자를 쓴다.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 부딪치는 소리가 흐느껴 우는 소리를 닮아서다. 3.8km에 펼쳐졌다 하여, 우는 듯한 소리가 십 리 밖까지 들린다고 하여 '명사십리'다. 해양치유센터가 들어섰다.
신선한 공기에 짠 내와 미역 내음이 섞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폐 깊숙이 들어 마셨다. 백사장 뒤를 해송 숲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앞은 드넓은 쪽빛 바다다. 가을 해수욕장에 맨발 걷기 하는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네는 바람 차지였다. 비켜 달라는 얘기를 못 꺼내고 살며시 흔들어주었다.
장보고대교를 건너면 고금도다. 완도 신지도 약산도가 둘러싸고 있고 내륙인 강진과 가까운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섬이 커서 농축산물과 수산물도 풍부했다. 이곳에 묘당도가 있다. 고금도 앞 조그마한 섬이다. 면적 0.11㎢. 간척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고 1598년 2월 본영을 고금진 묘당도로 옮겼다. 마지막 수군 기지였다. 이곳에 월송대가 자리한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여 장지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가기까지 83일간 유해를 봉안했던 터다. 충무공을 제사하는 충무사와 이순신 기념관도 있다. 바닷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약산대교다. 약초가 많은 '약산도(藥山島)'를 잇어준다. 삼지구엽초와 흑염소가 특히 유명하다. 방목 중인 흑염소가 2천여 마리, 주민 수 2천여 명이니 사람 반 흑염소 반이다.
오해는 남녀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완도에는 제주도로 들어가는 항구만 있는 줄 알았다. 보길도 세연정에서 놀았던 윤선도 이야기만 들었다. 영화 '서편제' 이후로 청산도 보리밭이 제일이라고 여겼다. 미안하다, 완도여. 겉만 보고 아는 체 했구나. 늦었지만 다행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네이버블로그(cumpan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