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만 인구의 도시에서 4만 명이 집결했던 이유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9.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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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외전] 박채영

[김종성 기자]

 1948년 10월 26일 여수서국민학교에서 부역 혐의자를 색출하는 장면으로 오른쪽 대열의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로 11월 1일에 처형되었다. 이 사진은 당시 호남신문사 사진기자였던 이경모씨가 촬영했다.
ⓒ 이경모
'여순사건' 하면,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도 떠오르고, 여수·순천의 민간인들도 떠오른다. 이 민간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인상은 학살 피해다.

그런데 이들이 피해자였던 것은 맞지만, 이 이미지만으로는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기 힘들다. 이들은 진압 현장 주변에 있다가 우연히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중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현장에 나갔다는 점은 사건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다.

이승만 정권은 통일을 위해 분단선거를 거부한 제주도민들을 진압할 것을 국군 제14연대에 명령했다. 이 같은 부당한 명령에 대해 14연대 군인들만 '노(No)'라고 외친 것은 아니다. 그곳 주민들도 '노'를 외치며 궐기했다.

사실, 그중 상당수는 그렇게 궐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민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훈련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그래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민족분단을 묵과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궐기한 동기는 그것이다.

극우 뉴라이트 진영은 이들을 좌파 빨갱이로 매도하지만, 해방 직후의 친일파들도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 빨갱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은 그들이 누구를 계승하는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8·15해방과 여순사건의 시간차는 3년밖에 되지 않는다. 사건을 주도한 현지 민간인 상당수의 리더십이 이 3년 내에 생긴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지역과 사회에 봉사한 것이 리더십의 원천이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이자 제14연대가 여수를 접수한 날인 1948년 10월 20일 오후 4시경이었다. 이때 중앙동 광장에서 시민대회가 열렸다. 정부군이 여수·순천을 장악한 뒤인 11월 2일 발행된 <조선일보>는 "4만여 명이라는 보기 드문 인원"이 20일에 모였다고 전했다.

이승만 정권이 여수 민심을 달래고자 여수시로 승격시켜 준 지 1개월 뒤에 나온 1949년 9월 16일 자 <경향신문>은 여수 분위기를 전하면서 "점차로 복구되어가고 있으며 인구수 상으로는 완전히 반란 전의 8만을 회복하였다"고 썼다. 8만 인구의 도시에서 4만 명이 여순사건 발생 다음날 중앙동 광장에 집결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군민들은 여수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위 <조선일보>는 위원회가 구성된 뒤 의장단 선출이 있었다면서 "이용기·박채영·송욱·유목윤·문성휘·김귀영"이 공동의장이 됐다고 알려준다.

여순사건 주도한 공동의장단은 항일투사 결집체
 지난 6월 25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일제강점기 전남 여수에서 활동하던 박채영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국가에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권고했다.
ⓒ 연합뉴스
여기서 두 번째로 거명된 박채영에 대해 한국전쟁(6·25전쟁) 74주년인 지난 6월 25일에 국가적 차원의 결정이 있었다. 그의 일제강점기 활동을 항일독립운동으로 인정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진실화해위는 박채영에 관해 "일제강점기 여수 지역 독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를 조직하여 해산(海山)노동부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라며 그의 활동을 "여수 지역 항일독립운동"으로 규정했다. 이는 그의 행적을 항일독립운동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고,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공자 인정 여하는 국가보훈부 소관이다.

1909년생인 그는 27세 때인 1936년에 일제강점기판 국가보안법인 치안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이렇게 된 것은 단순히 독서회에 가입하고 노동조합준비회를 조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제의 여수 지배에 지장을 주는 구체적인 투쟁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는 "여수 시내에 선전지를 살포하는 등 반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여수수산학교 내에 독서회를 조직하여 민족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에 관여하였다"고 설명한다. 또 "여수 고무공장과 항만운수 노동자의 동맹파업에 관여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여수 지역 학생과 노동자들이 일제에 저항하도록 격려하는 투쟁을 벌였다. 여순사건 때 공동의장이 된 데는 이런 경력이 밑거름이 됐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공동의장 중에서 박창래 한 사람만 독립운동가였던 것은 아니다. 의장단에 "이용기·박채영·송욱·유목윤·문성휘·김귀영"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1991년에 <성대사림> 제7집에 수록된 김인덕 재일코리안연구소장의 논문 '식민지시대 여수지역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일고찰'의 결론 부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끝부분에서 "여수 지역의 1920년대 대중운동의 경험과 1930년대의 전위운동의 경험은 이후 해방공간에서 여순항쟁으로 분출되었다"라고 말한다. 1920년대의 대중운동과 1930년대 전위운동의 목표는 반일과 독립이었다. 이 운동으로 축적된 역량이 여순사건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인적 동일성이다. 논문은 "이용기, 이창수, 박창래, 주원석, 유목윤, 박채영 등의 식민지시대 여수지역 민족해방운동의 지도 역량들은 이후 여수 지역에서의 여순항쟁을 주도하였다"고 강조한다. 의장 6인 중에서 이용기·박채영·유목윤이 이 대목에서 언급된 것이다.

한편, 또 다른 공동의장인 송욱에 대해 2013년에 <전북사학> 제43호에 실린 역사학자 주철희의 '여순사건 주도 인물에 관한 연구'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설명한다. 이 정도 되면 여순사건을 주도한 공동의장단은 항일투사들의 결집체였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를 좌파 빨갱이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채영을 비롯해, 제14연대와 함께 여순사건을 주도한 지도부 인물들이 항일투사들이었다는 점은 이 사건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는 여순사건에 대해 좌우 대결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적절치 않음을 의미한다.

박채영이 진정 원하는 것

박채영 등이 여순사건에 참여한 것은 이 항쟁 역시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을 동맹국으로 격상시키면서 한반도를 분단시키는 상황을 그들은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주 4·3을 응원하고 제14연대의 궐기를 지지했다. 이들에게 여순사건은 반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확장이었다.

제14연대 병사들의 대다수는 여수·순천과 이웃 지역에서 징발된 현지 청년들이다. 군대가 움직이는 상황에서 민간인인 여수 독립운동가들이 항쟁을 쉽게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제14연대의 이 같은 인적 구성과도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영향을 받는 여수군민 일부가 항쟁 와중에 제14연대와 의견 대립을 보인 일이 있다. 위 <조선일보>는 "학생대와 반군 사이에 내분"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군민들이 제14연대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상당한 역량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독립운동가들의 역량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이다. 박채영 같은 인물들의 의지를 투영시킬 수 있는 역학 관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1920년대부터 여수 항일운동에 헌신한 박채영은 8·15 해방 '이후'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제14연대와 함께 여순사건에 참여했다. 그는 분단을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총칼을 들이대는 이승만 정권은 부당하며 그런 이승만에게 무기를 드는 것은 정당하다는 신념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주지 않지만, 항일투사인 그가 여순사건에 참여한 것은 이 사건이 좌파 빨갱이들의 난동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남기는 일이었다.

이런 증거를 남긴 일로 인해 그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훨씬 더한 보복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받았다. 이승만의 군대에 붙들린 그는 항쟁 3개월 뒤인 1949년 1월 13일 동생과 함께 아무렇게나 학살됐다.

대한민국은 뒤늦게나마 이 학살이 잘못됐다고 시인했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은 작년 10월 19일 재심 재판에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진압군이 법규를 무시하고 체포·구금한 뒤 정당한 이유 없이 살해했다는 이유에서다.

박채영이 진정 원하는 것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는 수준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왜 여순사건에 참여했는지를 후세가 알기를 원할 것이다.

그는 일제의 전쟁범죄가 은폐되고 일본이 아닌 한국이 분단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저지하고 진정한 광복을 이루고자 했다. 자신의 그 같은 소망이 훗날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에게는 더 클 것이다. 국가보훈부가 자신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그의 일차적 관심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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