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미소보다 중요한 계산원의 덕목

김아영 2024. 10. 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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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웃거나 과하게 친절하지 않은, 나다운 계산원 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아영 기자]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난 이 아가씨 인상이 선해서 좋아."
"일부러 이 계산대로 왔어요. 멀리서 봐도 인상이 좋아서 나까지 기분이 좋아져."

부끄럽지만 일하면서 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쑥스러우면서도 그날 피로가 한순간 날아가 버린다. 내가 정말 인상 깊었던 건 그들의 말이 아니다. 내게 그런 말을 해주는 손님들의 인상이다.

그분들의 인상이 훨씬 좋았다. 다들 눈매가 서글서글하시고 입매가 곱고 웃을 때 생기는 주름이 다정했다. "손님이야말로 훨씬 인상이 좋으세요." 손님에게 느낀 바 그대로 화답했으면 어땠을까.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나는 기분 좋은 말을 들어 놓고도 한 번도 돌려드리지 못했다.

웃어도 웃지 않아도

사실 내가 근무 내내 웃는 표정을 하는 것도 아니다. 멍하게 허공을 보는 때가 많아 지나가던 직원에게 눈에 힘 좀 주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입을 안 가리고 하품을 하다가 마침 들어오던 손님과 눈이 마주쳐 "많이 졸리신가 봐요" 하는 말을 듣고 머쓱하게 웃은 적도 있다.

그러다 가끔 기운이 돌아오면 생긋 웃을 여유가 생기는데 마침 그 때 보신 손님들이 칭찬을 해주시는 것이다. 그때마다 새삼 되새기게 된다. 계산원은 계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면이 좀 부족할지언정 나에게 그나마 계산원으로서 괜찮은 구석이 있다면 좋은 인상이라는 것을.

예전에 편의점 안에 달린 팻말을 보고 거부감을 느낀 적이 있다. 근무자에게 항상 미소 짓고 손님에게 친절하게 인사하라는 근무 수칙을 알리는 팻말이었다. 물론 기업이 친절한 근무자를 선호하는 건 자연스러운 바람이다.

하지만 항상 웃으라는 수칙은 썩 좋게 보기 힘들었다. 내가 손님인 입장에서 봐도 그랬다. 어쩌다 공익광고에서나 나올 법 듯한 말투를 쓰고 핀으로 고정해 놓은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계산원을 만난 적이 있는데 오히려 불편해서 혼났다.

만약 종일 인상 쓰고 있는 계산원과 앞의 계산원 중 하나만 고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가 있다면 후자를 고를 것이다. 다만 심각하게 업무에 지장이 주는 게 아니라면 계산원의 표정은 업무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미소는 필수보다 선택에 가까운 사항이다. 표정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인데 감정을 표현하는 힘은 개인의 성격이 좌우한다. 저체중인 사람에게 무리한 중량을 들게 하면 안 되는 것처럼 감정 표현 자체가 서툰 사람에게 미소를 업무의 일환으로 지시하는 게 과연 온당한 처사일까.

일하면서 다양한 유형의 동료를 만났고 그들을 세심히 관찰했다. 일 잘한다는 소리가 듣고 싶었던 나는 그들의 장점을 하나씩 닮아가려고 노력했다.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흡수한 장점이 있나 되돌아보면 잘 모르겠다. 누군가의 장점은 그 사람의 성격에서 비롯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내가 따라하려고 해도 따라 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유독 다정한 말투를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 사근사근한 말투를 쓰면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이걸 내가 어설픈 서비스 정신으로 포장해서 따라 하면 가식적이고 형식적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또 다른 예로 성격이 꼼꼼한 사람은 원체 정리정돈을 잘해서 상품 진열이 남달리 깔끔하다. 하지만 내가 이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면 괜히 일만 벌리게 되고 시간이 배로 걸려 다른 일에 차질이 생겼다.
 계산원이 막 정리를 마친 진열 상태
ⓒ 김아영
좋은 계산원이란 어떤 계산원일까. 지금까지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자기 장점을 잘 살려서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나도 획일적인 틀에 갇혀 미소가 아름답고 말씨가 부드럽고 정석을 지키며 계산하는 사람이 계산원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편협한 고정관념이었다.

어떤 계산원은 좀 무뚝뚝하고 목소리가 작아도 매대 관리를 잘해서 손님들이 상품 가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고, 또 다른 계산원은 주변 정리나 청소는 좀 소홀해도 친화력이 뛰어나서 금세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 단골로 만들었다.

이전 글 중에 요즘 편의점 계산원의 평균 연령대가 올라갔다는 내용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편의점에 중년 이상의 계산원이 서 있으면 일처리가 미숙할 거라는 편견을 품은 적이 있다는 부끄러운 고백도 했다. 어리거나 젊은 사람을 주 소비층으로 공략하는 편의점이라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계산원이 나이가 많다는 게 과연 단점일까?

나이가 많아도 적어도

봉사 차원에서 다니는 아동센터에서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을 집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아이는 군것질이 하고 싶었는지 갑자기 동전 지갑 속을 헤집어보더니 편의점에 들렀다 가자고 했다. 떼쓰는 게 보통이 아닌 아이라 5분 이내로 고르기로 약속하고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갔다.

아이가 가진 돈은 겨우 900원. 매장을 둘러보니 살 수 있는 건 가장 싼 초코바나 추파춥스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먹고 싶은 게 많아도 너무도 많았다. 어차피 못 산다고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아이는 간식거리를 하나씩 다 집어보며 "이건 어때요?" 하고 일일이 물어보았다.

아이가 매대를 빙글빙글 돌면서 과자, 사탕, 젤리를 하나씩 다 만지는데 슬슬 계산원 눈치가 보였다. 나는 일부러 더 엄한 목소리로 "네 거 아니니까 내려 놔" 하고 주의를 주었다. 집에 가기 싫다고 한참 버티던 아이는 다신 안 데려다주겠다는 엄포에 결국 입을 삐쭉 내밀고 내가 처음 추천한 초코바를 골랐다.
 단 걸 좋아하는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다양한 군것질거리
ⓒ 김아영
계산대에 계시던 분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천 원도 안 되는 걸 파는데 얼마나 우리가 귀찮았을까 죄송한 마음에 눈치를 봤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분의 얼굴엔 짜증은커녕 인자한 미소만 있었다. 아이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내심 부끄러웠다.

내가 편의점에서 일할 땐 이렇게 시간을 끄는 아이들을 좀 귀찮아했기 때문이다. 내 눈에 초등학생은 통제가 힘들고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요주의 손님이었지만, 그 계산원의 눈에는 먹고 싶은 게 많아서 눈이 총총 빛나는 사랑스러운 손주뻘 아이였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 같이 근처의 다른 편의점을 갔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공교롭게도 대표 편의점 브랜드 세 곳이 근방에 다 몰려 있는데 우연히도 세 곳 다 중년 이상의 계산원이 근무했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가 아이가 들어오면 "안녕, 오늘은 뭐 먹고 싶어서 왔어?" 하고 살갑게 아는 척을 해주셨다.

행여나 아이가 젤리 매대를 두리번거리면 척하면 척이라는 듯 "XX젤리는 신상이라서 아직 없어. 내일 들어올 것 같은데 어떡하지?" 하고 안타까워하셨다. 참고로 내가 초등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근무할 땐 초등학생 손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거나 소비 취향을 알아준다거나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혹시나 계산원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아니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용기를 내길 바란다. 나처럼 계산이 느리고 덤벙대는 사람도 이럭저럭 잘 해내가고 있다.

잘 웃는 습관은 누구와도 싸우기 싫다는 소극적인 방어기제인데, 가끔은 내가 왜 웃었나 싶을 정도로 반사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와 자신이 싫어지기도 하는데, 계산대에 서 있을 때만큼은 장점으로 작용해서 톡톡히 덕을 보고 있다.

당신의 MBTI가 무엇이든,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다. 이 사회가 어떤 계산원을 이상형으로 세우든 크게 신경 쓰지 마시라. 당신은 좋은 계산원이 아니라 당신다운 계산원이 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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