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20미터 강풍에도 1시간 반을 머물렀던 까닭

안사을 2024. 9. 1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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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 하루 뙤약볕에서 하루, 설악산 종주 산행기

디지털 사진이 이메일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 <기자말>

[안사을 기자]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온 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영양, 삼척, 임계에서 각각 2박 3일을 보내고 강릉을 거쳐 속초에 도착했다. 이번 여정 중 어디 하나 경유지에 불과한 곳은 없었지만, 가장 큰 마음을 먹고 계획한 것이 있다면 바로 설악산 종주 산행일 것이다.

겨울 설악산은 네 번 탔지만 여름은 처음이었다. 영상 30도와 영하 10도 중 단연코 후자를 선택하는 체질이기도 하고, 설악의 풍경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뒤 눈과 기암이 주연이 되는 모습이 제맛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봄과 가을에는 길게 시간을 낼 수 없는 직업적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아내는 설악산이 처음이었다. 히말라야를 먼저 밟았고 알틴아라샨을 함께 걸었지만 오히려 설악산은 그곳보다 멀었나 보다. 다른 해보다 짧았던 여름휴가 기간, 설악산 종주를 모티브로 하여 14일간의 초승달 여행(경북, 강원을 거쳐 경기도로 진행하는 경로의 모양을 비유)을 짰다. 황색 절벽이 짙은 녹음과 어우러져 있을, 여름 설악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푼 채로.
 이튿날 설악이 마음껏 보여준 파란 하늘과 기암 절벽
ⓒ 안사을
안개 속 한계령에서 산행 시작

고민 끝에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소공원으로 내려오는 경로를 택했다. 경험상 정상을 통과하는 경로 중에는 이 길이 여러 모로 가장 좋았다. 속초에 숙소를 두면 들머리와 날머리가 다른 종주 산행을 하더라도 차를 찾으러 갈 때 그나마 시간과 경비가 적게 드는 편이기도 하다.

백담사에서 출발하는 길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종주보다는 왕복을 선택하게 된다. 자가용을 찾으러 속초에서 인제 용대리까지 가는 것은 아무래도 시간 낭비가 심하다. 한계령은 속초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다. 정해야 할 것은 들머리에 차를 두느냐, 날머리에 차를 두느냐이다.

첫 번째는 소공원(설악동)에 차를 두고 한계령으로 아침 일찍 시외버스를 이용해 가는 방법이다. 당일 산행이 아닐 경우, 한계령에서 대청봉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는 코스가 아니므로 입산 시간을 꼭두새벽으로 잡을 필요는 없다. 소공원에서 물치 정류소까지 시내버스를 이용한 후 그곳에서 동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잡아 탄 뒤 한계령 휴게소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두 번째는 산행 시작 날에 차를 가지고 한계령에 간 뒤, 산행을 마친 후에는 소공원에서 숙소까지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고, 다음날 역시 시외버스를 이용해 차를 찾으러 가는 방법이다. 첫째 방법은 산행이 끝날 때 내 차를 이용해 편하게 숙소로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둘째 방법은 산행을 시작할 때 조금 덜 서둘러도 된다는 이점이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둘째 방법을 택했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물치 정류소를 지나 한계령으로 가는 버스의 배차가 현저히 줄었다. 예전에는 6시 48분이었던 첫차가 9시로 늦춰졌다. 9시 버스를 타면 입산 시간이 10시를 넘기게 되므로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아내의 아침잠이었다. 7시간 정도의 충분한 수면 시간이 보장되어야 고장 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초행길 불안함에 체력을 꼭 비축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차를 끌고 한계령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결국은 잘한 선택이었다. 산행을 마치고 속초에서 하루를 쉰 후 어차피 인제로 향하는 동선을 밟아야 했기에, 시외버스로 한계령까지 가서 차를 찾은 후 그 길로 장수대를 지나 인제 읍내로 직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한계령 휴게소 (휴대폰)안개가 자욱하다. 한여름 이곳의 기온은 24도 미만이었다.
ⓒ 안사을
이날 들고 간 카메라는 삼각대를 반드시 연결해야만 촬영이 가능한 중형 파노라마 사진기였다. 필름면을 일반적인 카메라에 비해 네 배 가까이 쓰기 때문에 120짜리 중형필름 한 롤을 물리면 6장밖에 찍을 수 없다. 그래도 대형 인화에도 화질이 보장되니 중요한 사진을 찍을 때는 꼭 이 카메라를 들고 간다.

대신 순간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장면이나 편안하게 담는 사진을 찍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배낭에서 꺼내어 세팅하는 시간만 3분 가까이 되기에, 나를 위해 그 자리에서 머물러주는 나무나 바위 등만이 안정적인 피사체가 된다.

더군다나 이날은 산행 내내 안개가 자욱하여 올라가는 길에는 아래 사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색으로 올라왔지!"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덥지 않게 올라갔다. 다른 곳은 폭염주의보였지만, 이곳에선 안개가 해를 가려주었고 옅은 분무기처럼 우리의 몸을 감싼 물방울들이 체온을 내려주었다.
▲ 대청봉 가는 길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올라가는 길. 안개가 자욱하다.
ⓒ 안사을
몸을 가누기 힘든 바람, 그래도 한 시간 이상 머물렀던 이유

천천히,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7시간이 걸렸다. 이전에는 중청대피소에 멈춰서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일출을 보러 대청봉을 올랐다. 지금은 중청대피소가 공사 중인 고로 정상까지 곧바로 올라온 후 잠은 소청대피소에서 청하기로 했다.

공룡의 뒷목처럼 잠시 오목한 중청봉과 대청봉의 사이를 지나면 본격적인 설악의 바람이 시작된다. 밑에서 초속 8미터 정도의 바람이 불었다면 이곳에서는 초속 20에서 30미터의 무시무시한 돌풍이 쉴 새 없이 불어닥친다. 순간 풍속이 40m/s를 기록하는 것이 예사인 곳이다.

▲ 엄청난 바람 대청봉을 오르는 마지막 구간에서부터 이런 바람이 시작된다. ⓒ 안사을

거센 바람을 안전하게 통과하려면 자세를 낮춰야 한다. 스틱과 두 발을 네 발처럼 이용해야 하고, 스틱이 없다면 차라리 기어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돌이 불규칙하게 쌓여있기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발을 헛디디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이런 바람은 순식간에 체온을 뺏아간다. 여름 산행이라 하더라도 바람막이 재질의 긴팔 옷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해발 1,700미터가 넘기에 한여름 낮이라도 기온이 20도 밑으로 떨어질 수 있고, 바람까지 더해지면 체감온도는 한 자릿수를 기록한다.

붉은 글씨의 정상석 뒤편에 어느 정도의 공간이 있다. 이곳에 몸을 기대면 바람을 피할 수 있다. 구름과 안개가 쉴 새 없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산 밑의 날씨는 분명히 맑았기에 이곳에 걸쳐있는 구름만 살짝 걷히면 세상이 열릴 것 같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아래를 응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뒤통수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구름이 한순간 걷혀서 햇빛이 내리쬔 것이었다. 그로부터 15초 남짓 후, 아내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뻥 뚫린 하늘이 저 멀리 이동하여, 내설악의 삐죽삐죽한 봉우리들과 파랗다 못해 검푸른 동해바다의 수면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이래서 산행은 천천히 긴 시간을 가지고 계획하는 것이 좋다. 전망 좋은 곳에서 한 시간 이상 기다리다 보면 융단 같은 구름을 보든, 구름 밑 세상을 보든,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 대청봉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이기에 더욱 소중한 풍경
ⓒ 안사을
위 사진을 담은 후에도 한 시간 여를 머무르면서 진한 구름과 연한 안개를 온몸으로 만끽했다. 머리카락은 미역처럼 달라붙었다가 채찍이 되어 볼을 때렸다가 하며 춤을 추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대자연 속의 원시인처럼 해맑았다.

세 명의 사람이 각각 올라왔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며 황급히 내려갔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하늘과 바다, 거칠고 아기자기한 설악이 어우러진 모습을 10번도 넘게 봤다. 그곳은 아랫마을과는 명확히 구분된 또 다른 세상이었다. 왜 옛날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제사를 지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소청대피소·천불동 계곡은 설악산 경치 중 최고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산 경치 중 최고를 뽑으라면 나는 천불동 계곡길을 뽑는다. 또한 가장 전망이 좋은 숙소를 고르라면 단연코 소청대피소를 택할 것이다. 고민의 여지가 없다. 동점의 가능성도 없다.

대청봉에서 소공원으로 하산하는 코스에서 소청대피소를 이용하려면 가던 길을 벗어나 잠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다음날 같은 길을 다시 올라와야 하는 수고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청대피소를 예약한 이유는 그 풍경에 있다. 용아장성의 거대한 손가락에서 출발하여 공룡능선과 울산바위까지 한눈에 담기는 구성이 눈앞에 펼쳐진다.
▲ 소청대피소에서 누룽지로 아침밥을 해결하고, 출발하기 직전에 찍은 사진
ⓒ 안사을
천불동 계곡은 또 어떠한가. 금세라도 쏟아질 것 같은 황갈색 기암절벽이 곳곳에 서 있고 그 사이로 힘차게 흐르는 맑은 계곡이 환상적이다. 어지간히 화각이 넓은 광각렌즈를 챙기지 않으면 한 화면에 풍경을 담기가 어려울 정도로 조밀하면서도 광활하다.
국내 여행기를 쓰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해외의 풍경이 훨씬 웅장하고 멋지다고 환류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곳 설악산, 특히 천불동 계곡은 그 규모와 아기자기함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독보적인 매력이 있다. 많은 곳을 가보진 않았지만 이런 아름다운 골짜기에 석회수가 아닌 투명하고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는 곳은 지금까지 찾아보지 못했다.
▲ 소공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짙푸른 나뭇잎이 액자가 되어 멋진 기암 절벽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 안사을
▲ 천당폭포 파란 하늘, 옥색 물빛이 어우러진 천불동 계곡
ⓒ 안사을
▲ 골짜기의 깊이 등산로의 크기를 보면 골짜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안사을
내려오는 길은 오히려 올라오던 길보다 힘에 부쳤다. 기온 때문이었다. 쉴 새 없이 냉각수가 공급되었던 전날의 안개 산행과는 완전히 반대로, 폭염과 뙤약볕을 견디며 걸어야 했다. 몸을 날릴 듯이 불어대던 바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사람을 말려 죽일 듯한 열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양폭대피소에서 잠시 쉬며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다시 걸었다. 가파른 길은 아니었지만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쉴 새 없이 들리는 힘찬 물소리에 마음만큼은 청명했다. 길과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선 그늘에서 잠시 쉬며 서늘함을 만끽했다.

소공원에 주차장에 도착하자 오후 5시였다. 소청대피소를 왕복하느라 거리가 살짝 늘어 20km가 조금 넘는 거리를 걸었다. 지친 발과 어깨는 얼음 콜라 한 잔에 쌩쌩해졌다. 마침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7-1번 버스를 타고 속초 시내 숙소로 향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푹 쉰 후 다음날 일찍 한계령으로 다시 가서 인제로 향할 순서였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7월 23일부터 8월 5일까지 있었던 경북, 강원 여행 중 설악산 종주(한계령-설악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제 어느 산 속에서 자연인으로 존재했던 '하늘내린터 숲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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