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쥐락펴락한 궁녀, 조선 뒤흔든 비선 실세
[이준목 기자]
"조선 3백년 사직은 김상궁이 망치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통곡합니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조선 15대 광해군 시절 한 홍문관 관리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한 궁녀의 전횡을 지적하며 통탄하는 내용이다. 고작 일개 궁녀에 불과한 '상궁 김씨'라는 인물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원흉으로 지목되었다는 점에서 역실적으로 그녀의 엄청난 영향력을 짐작게 한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유교 사회 조선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일개 궁녀로 시작하여 일약 천하를 호령하는 '권신'의 지위까지 오른 여성이 바로 상궁 김씨였다. 그녀는 타고난 정치감각과 모략으로 조선의 국정을 뒤흔든 희대의 '비선실세'이자, 무려 두 명의 국왕을 죽거나 폐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 '킹메이커'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왕비나 후궁을 제외하고 조선 역사에서 이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록에까지 이름을 남긴 여성은 전무후무하다.
|
|
| ▲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 ⓒ tvN스토리 |
과연 상궁 김씨는 누구이며 어떻게 조선을 뒤흔들었을까. 8월 9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궁녀 김개시는 어떻게 광해군을 폐위시켰나' 편을 통하여 조선의 역사를 바꾼 한 궁녀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김개시(金介屎~1623년)는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시대의 궁녀였다. 특히 광해군 시대에는 일개 궁녀를 넘어서 국왕의 책사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활약했고, 왕의 권위에 올라타 호가호위하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입지전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김개시의 출생과 입궁 과정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이름에서 그녀의 배경을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는데, 개시의 한자 시(屎)는 '똥'을 뜻하기 때문에 그녀의 본명은 '김개똥'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록에는 본명을 그대로 적기 불편했기 때문에 한자로 바꿔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개똥이는 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이었고 실제 궁녀들이 대부분 천민 출신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개시 역시 노비의 딸로 태어나 10대 초중반 정도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개시는 당시 여성들, 특히 하층민들은 거의 배우지 않았던 글을 깨우칠만큼 어릴때부터 똑똑하고 야무졌다고 한다. 그녀가 문자를 배웠다는 것은 나름대로 야심만만하고 신분상승욕구가 강한 능동적인 여성이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당시의 궁녀들은 처음 모신 상전을 끝까지 모시는 것이 원칙이었다. 입궁한 김개시가 모시게 된 상전이 바로 왕자 시절의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이었다. 총명했던 김개시는 성심을 다하여 광해군을 모시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만남은 훗날 광해군과 김개시, 두 사람의 인생과 조선의 역사까지 바꾸는 운명적인 인연이 된다.
1592년, 평온하던 조선을 뒤흔드는 임진왜란이라는 대사건이 발발한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수도 한양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당시 국왕 선조는 궁궐을 비우고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선조를 수행하는 파천길에 뜻밖에도 김개시도 합류한다.
김개시는 본래 광해군의 궁녀였지만, 전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맞이하여 우수한 궁인들 위주로 왕의 수행원을 재편성하면서 김개시도 특별히 발탁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시가 김개시에게는 또다른 기회가 된 셈이었다. 김개시는 남다른 총명함으로 선조의 마음까지 사로잡았고 전쟁중에 단숨에 일반궁녀에서 정 5품 특별상궁이 되는 파격승진을 누렸다.
왜란으로 신분이 달라진 또다른 인물은 바로 김개시가 모셨던 광해군이었다. 선조는 적자를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 세자의 자리를 25년이나 비워놓았으나, 왜란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다급해지자 마지못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피난을 떠나 명나라 망명까지 고려하던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임시로 세운 조정)를 이끌며 흐트러진 조선의 민심을 수습했다. 세자 광해군의 이러한 전시 활약상은 국왕 선조가 추락시킨 왕실의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 궁으로 돌아온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는 악화된다. 선조는 평생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왜란으로 권위가 추락한 자신과는 정반대로, 전쟁영웅으로 활약하며 민심을 얻은 아들 광해군 역시 질투하고 견제했다. 선조는 세자 자격으로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온 광해군에게 "너는 임시로 봉한 세자일뿐"이라고 일축하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이는 광해군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겼다.
또한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한 지 2년만에 간택으로 계비 인목왕후를 들인다. 그로부터 4년뒤인 1606년 인목왕후는 아들 영창대군을 낳는다. 선조가 그토록 바라던 적자가 탄생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선조에게 배척당하고 있던 광해군으로서는, 이제 아버지가 정말로 세자를 바꿀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안한 광해군에게 다가온 뜻밖의 인물은 바로 김개시였다. 그녀는 현재 선조의 상궁이었음에도 광해군의 편에 서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 선조는 1년 넘게 병을 앓고 있었고, 눈치빠른 김개시는 선조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예측했다. 보통 궁녀는 자신이 모시던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출궁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야심이 컸던 김개시는 궁에 남기 위하여 새 주인이 필요했다. 영창대군이 있었지만 아직 두 살에 불과했고 국왕인 선조라고 해도 세자를 교체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김개시는 선조가 이대로 승하한다면 현재의 세자인 광해군이 후계자가 될 것이 확실하다는 게산 하에, 광해군을 택군한 것이다.
김개시는 오랜 궁궐 생활을 통하여 궁안 곳곳에서 심어놓은 정보망을 활용하여 광해군의 눈과 귀 역할을 해줬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 놓여있었을 광해군에게 김개시는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1608년 3월 6일, 선조가 승하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선조는 최근 병세가 호전되는 듯했고 사망 당일에는 점심수라와 약밥까지 잘 먹었으나 그날 돌연 급사했다고 한다. 이는 선조가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불러왔고, 측근에서 선조를 모시던 김개시와 광해군이 배후로 지목됐다. 다만 학계 전문가들은 독살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김개시의 나쁜 평판과 모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하고 있다.
선조가 승하한 상황에서 후계자는 당연히 세자인 광해군이었다. 놀랍게도 대비가 된 인목왕후는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광해군의 즉위를 누구보다 적극 지지했다. 인목왕후로서는 어차피 선조가 없는 상황에서 아들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차라리 아들을 지키기 위하여 광해군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광해군 즉위의 일등공신은 단연 김개시였다. 그녀는 자신이 모시던 선조가 승하했음에도 출궁하지 않고 오히려 광해군을 다시 최측근에서 모시게 되었다. 세간의 의혹과 비난도 김개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개시는 어떻게 선조와 광해군이라는 두 국왕의 마음을 연이어 사로잡은 것일까. 실록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으며, 흉악하고 계교가 많았다"며 김개시의 용모와 성향을 품평한 대목이 나온다. 사관의 개인적인 악감정이 반영된 평가이기는 하지만, 조선사의 유명한 악녀로 꼽히는 장녹수나 장희빈처럼 적어도 외모나 성적인 매력이 김개시의 강점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김개시는 일반적인 상궁과는 달리 사실상 후궁처럼 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잠자리를 가질 때면 비방(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사랑을 얻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김개시가 상궁임에도 중전이나 후궁보다 더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 '특수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광해군도 세자 시절부터 물심양면으로 자신의 곁을 지켜준 김개시에 대한 애착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개시가 마음만 먹었다면 '광해군의 후궁'이 되어 왕실의 일원이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올라서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개시는 놀랍게도 끝까지 상궁으로 남을 것을 자처한다. 학계에서는 이 역시 야심이 컸던 김개시가 내린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라고 해석한다. 후궁이 되면 궁밖 출입이 불가능해지고 운신의 제약이 많아지지만, 상궁으로 남으면 광해군과 신임과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더 자유로운 정치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이후 피의 복수를 단행한다. 먼저 선조를 도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면서 자신을 여러 차례 사지에 몰아넣었던 영의정 유영경과 반대세력들을 제거한다. 또한 광해군의 다음 목표는 언제든 왕위를 위협할 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이복형제 영창대군과 계모 인목대비였다.
이에 앞장선 것은 김개시였다. 그녀는 궁녀들을 포섭하고 사주하여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귀신 소동을 일으키거나 대비의 처소에 방화를 저지르는 등 여러 차례 모자를 해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배후에 광해군의 비호가 있었기에 인목대비는 일개 상궁인 김개시의 만행에도 속수무책이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발하며 영창대군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역모 사건에 연루된다. 당시 문경새재에서 벌어진 '은상강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박응서라는 인물이 '역모세력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려고 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비롯한 영창대군 지지세력들이 역모 혐의에 연루됐다.
박응서의 거짓 자백을 사주하고 역모 혐의를 조작한 것은 광해군의 측근인 이이첨(1560-1623)이라는 인물이었다. 이이첨과 김개시는 궁안팎에서 파트너십을 형성하며 광해군을 위하여 지저분 한 일들을 앞장서서 처리해주는 해결사같은 존재였다.
광해군이 이이첨을 사주하여 역모 사건을 처음부터 기획했는지, 혹은 최소한 알고도 묵인했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광해군은 옥사를 정치적으로 잘 활용하여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써먹은 게 사실이다. 역모에 연루된 김제남과 아들들이 줄줄이 사망하며 인목대비의 친정은 풍지박산이 났다. 광해군은 겉으로 어린 이복동생의 처벌을 망설이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영창대군 역시 폐서인 이후 강화도로 유배보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김개시는 인목대비의 상궁을 꼬드겨 영창대군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게 한 뒤 중간에 입수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고 한다. 편지에는 '영창대군을 잘 길러뒀다가 명나라 장수가 와서 문을 열면 고이 모셔오라'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추가했다. 이는 언젠가 광해군을 페위시키면 영창대군을 왕위에 옹립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단순한 안부편지가 졸지에 역모 모의 밀서로 탈바꿈한 것이다. 광해군은 편지를 읽고 대노했다고 한다.
밀서 사건이 벌어지고 약 열흘 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614년 3월 19일, 8살의 어린 영창대군이 뜨거운 방에 갇혀 쪄 죽는 의문의 증살을 당한 것이다. 영창대군의 죽음을 끝으로 길고 잔혹했던 옥사는 막을 내린다. 인목대비는 뒤늦게 아들의 죽음을 전해듣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했다고 한다.
4년 뒤인 1618년, 광해군은 이번엔 계모 인목대비마저 대비의 지위를 박탈하고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킨다. 이로써 광해군은 조선 역사상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를 저지른 유일한 국왕이 되었고, 그 실질적인 설계자는 김개시였다. 피비린내나는 권력다툼은 일단 광해군과 김개시의 정치적 승리로 막을 내리는 듯 했지만, 이 과정에서 각인된 잔인무도한 '패륜아'의 이미지는 오히려 광해군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시발점이 됐다.
|
|
| ▲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 ⓒ tvN |
이후로도 김개시는 광해군의 전폭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실록에는 '정사를 열 때마다 김상궁이 붓을 들어 마음대로 결정하고 임금도 마음대로 못 하였다'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김개시가 일개 궁녀로서 해서는 안 될 월권을 자행했고, 정작 광해군은 선을 넘는 김개시의 행동을 묵인했다는 것. 또한 김개시는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심지어 광해군의 후궁들마저도 김개시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1622년 12월, 광해군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경고가 나왔다. 광해군은 '이귀과 김자점이 주동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는 고변을 받는다. 그런데 평소 역모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광해군답지 않게 이를 무시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김개시가 광해군에게 '가소롭다. 김자점은 충신이고 역모를 일으킬만한 힘이 없다'고 변호했다고 한다. 김개시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던 광해군은 그 말을 믿고 "소문만으로 옥사를 일으킬수 없다"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판단은 광해군과 김개시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됐다.
약 3개월 뒤인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은 도망쳤으나 반란군에게 사로잡힌다. 광해군은 처음엔 측근인 이이첨이 모반을 일으킨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실제 반란의 주동자는 바로 이귀와 김자점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 것은 김개시의 행적이다. 의심이 많고 정보에 밝았던 김개시는 정말 반란의 가능성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심지어 김개시는 왜 역모의 가능성을 적극 부인하고 오히려 주동자인 김자점을 변호하기까지 한 것일까.
일부 학계에서는 당시 김개시가 이미 반정군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눈치빠른 김개시는 당시 광해군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고 어차피 정권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차라리 반란군과 손을 잡아 자신의 살길을 모색하려했다는 분석이다. 물론 김개시가 정말로 반란의 낌새를 전혀 몰랐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의도였던 간에 결과적으로 김개시의 잘못된 조언이 광해군의 눈과 귀를 가려서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오판의 대가는 혹독했다. 반정군은 궁궐을 점령하고 김개시를 사로잡자마자 형식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즉결처형시켜버렸다. 김개시의 기대와는 달리 애초에 반정 세력의 첫 번째 척결대상으로 거론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김개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반정세력의 배후에 있었던 것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였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정치적 명분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고, 인목대비를 복권시키고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는 것으로 반정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을 죽이고 친정을 멸문시킨 광해군과 김개시에 대한 원한이 하늘을 찌를 듯 깊었다. 반정군으로서는 설사 김개시와 정말 내통했더라도 목대비의 철천지원수였던 그녀를 본보기 차원에서라도 절대 살려둘 수 없었던 상황, 반정이 일어나는 순간 김개시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었던 셈이다.
김개시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여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처세와 모략만으로 인생역전을 이뤄냈고, 왕의 '정치적 참모이자 파트너'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재능보다도 더 커졌던 비뚤어진 욕망은, 그녀 본인뿐 아니라 광해군의 몰락마저도 앞당기는 비극을 초래했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이후 조선의 역사에도 적지않은 그늘을 남겼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