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상사 앞에서 술잔을 엎어 놓으면 생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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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기자]
1970년대에 태어난 나는 X세대다. 내년이면 만으로도 오십이다. 중간에 일을 좀 쉰 것을 감안해도 직장생활이 삼십 년이다. 처음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실습생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때 실습생으로 들어간 회사는 직원 백명이 조금 넘는, 비디어 폰을 만드는 회사였다.
회사에선 가정집 형태의 기숙사를 제공했다. 기숙사에는 실습생과 형들 4~5명이 함께 생활을 했다. 회사 형들은 매주 한 두번은 기숙사에서 회식을 했다. 회식을 매일 할 때도 있었다. 특히 금요일에는 형들이 기숙사에 술과 안주를 사와서 새벽 늦도록 술을 마셨다.
술이 싫었던 이유
나는 회식이 싫었다. 정확히는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하는 회식이 싫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당신의 힘겨운 삶의 스트레스를 연약한 어머니와 철없는 우리 3형제에게 풀었다. 하지만 그토록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사인은 간경화였다.
▲ 드라마 미생 tvn드라마 미생 회식 장면 |
ⓒ tvn |
나는 회식이 정말로 싫었다. X세대나 MZ세대나,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회식은 똑같이 힘들고 불편한 자리다. 물론 실습생들 중엔 술을 잘 먹고 좋아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게 억지로 마셔야 하는 소주는 언제나 썼다. 달콤한 메로나와 부드러운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던 나는, 쓰디 쓴 소주를 세상의 쓴 맛을 알기도 전에 마셔야 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나는 회사 형들이 왜 술을 좋아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도 잔업을 마치고 10시쯤 형들이 기숙사에 술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자리엔 다른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형들도 함께였다.
"야, 넌 왜 술 안 먹고 있냐?"
나보다 다섯 살이 많던 형이 술을 안 먹고 앉아있던 나를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죄송한데, 제가 술을 잘 못해서요."
"야 인마, 이놈 순진하네. 앞으로 사회생활 잘하려면 술도 좀 하고 그래야 해. 한잔 받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형이 주는 거니까 한잔 받아."
나는 할 수 없이 소주 잔을 들어 그 형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는 않고 소주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 형은 다른 형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내가 내려 놓은 술잔을 발견하곤 거듭 노려보았다.
"너 술 진짜로 안 마실거야?"
"죄송해요."
"그래. 술 마시기 싫으면 술잔을 엎어 놔. 그럼 술 안 마시는 걸로 알 테니까."
"정말요?"
"그래, 나도 처음엔 술 못 마실땐 그랬어. 괜찮아."
"정말, 그래도 되요?"
나는 처음엔 그 형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형이 거듭 술을 마시기 싫으면 술잔을 엎어 놓으라고 했다. 망설이던 나는 내 앞에 있던 소주 잔을 엎어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당돌한 행동이었다. 나에게 술을 몇 차례 권하던 그 형은 내가 정말 자기 말대로 소주잔을 엎어놓자 '뭐 이런 X이 다있어'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술 안 마실거지?"
"네."
"너, 술 안 마실 거면 저 방에 들어가서 자라."
나는 그 형의 말대로 작은 방으로 건너가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거실에서 들려오는 형들의 번잡한 이야기 소리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게 술을 권하던 형이 다른 형들에게 내 이름을 조용히 물었다. 그러더니 내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야, 쟨 뭔데 형들이 주는 술도 안 먹냐. 게다가 내가 술잔을 엎어 놓으랬다고 진짜로 소주잔을 엎어놓는 건 또 뭐냐. 버릇없는 놈이네?"
그 형은 다른 형들 앞에서 내 이름을 들먹이며 험담을 하기 시작 했다. 겨우 잠이 들려던 나는 순간 훅 잠이 달아나 버렸다. 당혹스러웠다. 험담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 회식 직장 동료들과의 술자리 |
ⓒ 김인철 |
술은 상황과 감정에 따라 한없이 쓰다가 맹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날은 담백하고, 어떤 날은 달달하고, 그리고 어떤 날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이제는 회사나 개인사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내가 먼저 동료나 지인들에게 술 자리를 청하기도 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을뿐 술이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서른이 넘어 세 번째로 이직한 직장은 회식문화가 독특했다. 그곳은 여자들이 다수였다. 남자들 일색이던 직장과 회식문화가 달랐다. 입사 후 한달쯤 지나 회식일정이 잡혔다. 그런데 회식 일정이 조금 달랐다.
회식을 저녁이 아닌 점심에 한다는 것이다. 미리 예약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눈 다음 다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처음엔 이게 무슨 회식이야?라는 생각이 들고 낯설었다. 물론 저녁에도 회식을 하면서 술도 한두 잔 하긴 했지만 주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식을 했다.
회식은 업무의 연장? 그 말도 맞지만
요즘 MZ세대는 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며, 불필요한 시간 낭비라는 의견도 많다.
▲ 회식 실습생 시절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의 모임 |
ⓒ 김인철 |
하지만 회사는 사적인 공간은 아니다. 회사에는 조직이 있고 위계가 있다. 회사의 비전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구성원들 간에 긴장과 스트레스가 생길수 밖에 없다. 조직 내에서 상사는 물론 동료들과도 편한,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얘기다.
회식은 직장생활에서 때때로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회식은 사회의 쓴맛을 경험하며 인생을 배우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소통 방식 중 하나일 수 있다. 상사나 동료, 그리고 부하직원에게 업무상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회식 자리에서 한다면 이는 오해와 갈등을 푸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회식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즉흥적이지 않아야 한다. 둘째, 최소한 회식 일주일 전에는 직원들에게 공지를 해야 한다. 셋째, 강제성이 없어야 한다. 다음날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마시면 안 된다. 이 정도만 해도 큰 갈등은 없을 것이다(또, 아마 MZ세대라고 해서 다 회식을 싫어하진 않을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사회에 첫발을 내 딛으면서 담배와 술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담배는 여전히 '노담', 결심을 지키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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