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중앙선 동쪽 종점에서 나온 전쟁 영웅들 [중앙선 역사문화기행]
[최서우 기자]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가장 동쪽에 있는 종점, 지평역. 1일 편도 5~6회만 다녀서, 승강장이 매우 한산하다. 역 주변 일대도 가을 추수가 끝난 논과 아기자기한 집들로 이뤄져서 매우 고요한 분위기다. 원래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지평현이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는데, 현 단위인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작은 규모의 고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전쟁 통사에서 지평역 일대는 굵직굵직한 전투들로 가득하다. 고려시대 때는 야별초가 몽골군을 몰아냈던 전적이 있고, 구한말에는 지역 유림들이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개화파 내각의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켜 제천 등지에서 활약했으며, 6.25 전쟁 때는 국군과 UN지원군의 일원인 미군, 프랑스군이 중국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큰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조용한 마을이지만, 크나큰 전쟁의 역사를 겪은 양평군 지평면으로 가보자.
오늘날 평온한 분위기의 지평면과 지평향교
지평면 중심부는 지평역에서 남동쪽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차로 오는 경우 서울이나 수도권 북부에서는 6번 국도를 타고 금곡교차로에서 내려와 용문면 광탄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70번 지방도를 따라 내려와 지평면사무소로 향하면 된다.
경기남부, 강원남부, 호남, 영남에서는 광주원주고속도로 동여주 나들목에서 좌회전하여 주암1리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345번 지방도를 따라가자. 그리고 341번 지방도 지평의병로를 따라가면 나온다.
▲ 강학공간인 지평향교 명륜당 |
ⓒ 최서우 |
▲ 보수에 들어간 지평향교 대성전.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봉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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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향교가 있다는 것은 조선시대에 독립된 현이나 군이었다는 증거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는 '양평'의 유래와도 연관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근군과 지평현이 독립된 지역으로 있었는데, 대한제국 말기에 통합되어 오늘날 지명이 된 것이다. 향교가 있으면 근방에 옛 관아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지평교회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 을미의병기념비와 수많은 비석들. 기념비 뒤로 역대 지평현감들과 경기도 관찰사들의 선정비가 있다. |
ⓒ 최서우 |
가운데 큰 비석에는 '을미의병기념비(乙未義兵記念碑)'라고 적혀 있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전국 유림들이 이에 통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지평면도 이에 예외는 아니었다.
▲ 지평리전투 유엔군 참전 충혼비. 왼편에 있는 프랑스군 충혼비가 눈에 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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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지평의병
기념관을 들어가면 1층 왼편에는 구한말 지평의병에 대한 설명이, 오른편에는 한국전쟁 때 UN군이 활약했던 지평리 전투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지평면에는 또 다른 전쟁의 역사가 있는데, 고려사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辛亥 夜別抄與砥平縣人, 夜擊蒙兵, 殺獲甚多, 取馬驢來獻."
(신해(1235년 음력 10월 22일) 야별초(夜別抄)가 지평현(砥平縣) 사람들과 함께 몽고군을 밤에 공격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으며 말과 나귀를 노획하여 돌아와 (조정에) 바쳤다.)
▲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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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왼편으로 가서 660년 후에 일어났던 지평의병에 대한 내용을 보았다. 일제의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으로 인한 1차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 주역은 안종응, 안승우 부자와 이춘영 그리고 이춘영의 설득으로 지평현 400명의 관군을 의병으로 이끈 김백선이다.
안종응은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데, 양근군의 향사였던 이항로는 병인양요 때 서양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위정척사를 주장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학자로서는 성리학 주리론 해석에도 능해서 수많은 문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문인 중 나오는 대표적인 사람은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최익현과 유인석을 꼽을 수 있다. 이춘영, 김백선을 중심으로 한 지평의진도 이들과 합류하여 원주, 제천, 충주와 단양 일대에서 활약했으니, 충청도의 을미의병은 이항로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화서학파 유림들이 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을사늑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과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에 일어난 1907년 정미의병 때도 지평면은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한 주요 전장이었다. 그중 유명한 전투가 삼산리 전투인데, 일제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용문사, 상원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 을미년 지평의병의 주역들 |
ⓒ 최서우 |
▲ 프레데릭 아서 메킨지가 담은 양평 일대 정미의병들. 구한말 의병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진이다. 살아남은 대다수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
ⓒ 프레데릭 아서 메킨지 |
당시 지평에는 미군 제2보병사단 23연대와 프랑스 대대가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전장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남쪽에서 올라오는 기갑부대를 합류시키기 위해 리지웨이 장군은 진영 깊숙한 곳에 주된 병력을 두는 종심방어로 지평리를 사수하기로 한다.
▲ 한국전쟁 당시 지평리 아군 방어선. 방어선 주변 산지에서 중국군 5만명이 유엔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
ⓒ 최서우 |
▲ 1951년 2월 지평리의 전황 |
ⓒ 최서우 |
당시 프랑스 정부는 한국전쟁에 대대급 부대를 파견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대를 지휘하는 요직은 중령이었기 때문에, 몽클라르가 참전을 위해 스스로 계급을 낮춘 것이다. 프랑스 대대는 지평리뿐만 아니라 양평과 원주 일대에서 중국군과 혈투를 벌이며, 영남으로 가는 요충지를 육탄으로 방어하며 활약했다. 몽클라르를 위시한 대대의 공로로 인해 기념관에 프랑스어로 된 전시 안내문이 있고, 그 옆에 추모비가 세워진 것이다(몽클라르는 귀국한 후 다시 중장으로 복귀했다).
한반도가 전화에 휩싸일 때 전쟁터가 된 양평군 지평면(砥平面). 신라시대 때 지은 이름 뜻대로 숫돌처럼 평평한 마을은 고려시대 몽골에 저항한 야별초부터 구한말 일제에 항거한 의병을 거쳐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사투가 있었던 군사요충지였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상당히 참혹한 전투가 일어난 지라 국군, 유엔군 전사자의 유해뿐만 아니라 당시 적군이었던 중국군 유해까지 발굴된다고 한다. 발굴된 외국인 병사 유해와 유품은 옛날 아군 적군 따지지 않고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유엔 참전국 또는 중국에 송환한다.
▲ 평화로운 지평면 마을. 다시는 전쟁영웅이 나오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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